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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없었던 그녀

by 마을지기 posted Jun 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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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날 2007-11-27
출처 강유일, 《피아노 소나타 1987》((주)민음사, 2005), 105-106쪽
책본문 한 고독한 독신의 중년 여자가 열두 개의 초콜릿 바를 구워 무작위로 타인의 편지통에 집어넣었다. 편지통에 담긴 그 초콜릿을 먹은 한 회사의 여비서가 혀에 돌연한 혈관출혈로 부랴부랴 병원으로 후송됐다. 응급 수술팀은 그녀의 입 안과 기도에서 잘게 잘린 면도날 조각들을 발견했다. 경찰은 곧 '초콜릿'이란 이름의 특별 수사팀을 조직했다. 결국 이 고독한 독신녀가 범인으로 체포됐다. 그녀는 너무도 외로워 깊은 밤 혼자 날이 시퍼런 새 면도칼들을 잘게 잘라 그것을 코코아 반죽에 넣은 뒤 우유와 향료를 들이붓고 초콜릿 바를 구워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협박을 하거나 돈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진술에서 그녀는 자신은 너무 고독했고, 그 밤은 너무 짙은 암흑에 싸여 있었으며, 그 암흑 속에서 빛나는 것이라고는 오직 선반 위에 놓은 면도칼의 푸른 날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고 그 면도날이 어둠 속에서 섬뜩한 푸른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 자기의 존재를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그 푸른 면도날을 잘라 초콜릿을 구워 무작위로 타인의 편지통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 코코아 반죽 속에 처넣어진 면도날 조각들이야말로 그녀의 존재를 슥슥 베어버린 그녀의 고독의 일부가 아닐까. 세상은 수선을 떨며 결국 여자를 체포했고, 그 고독한 여자는 체포됨으로써 비로소 말 상대를 얻었다. 경찰관의 심문이 그녀의 유일한 대화가 되어주었으리라. 사람들은 그녀와 대화하는 대신 수사관에게로 그녀를 보내버린 것이다.
사용처 1. 20070701 구미안디옥교회 주일예배.
2. 20101005 내일신문칼럼.
어두운 밤, 너무 고독했던 그녀.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이라고는 푸른 칼날뿐.
칼날을 조각내서 코코아 반죽 속에 넣은 뒤,
아무 집이나 다니면서 우편함에 배달.
이웃이 그녀와 대화하기를 거절한 결과,
그녀가 비로소 맞이한 대화 상대는 경찰관.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것, 아니 싸움이라도
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복입니다.

이야기마을 옹달샘

전대환의 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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