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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내 딸 가빈이에게!

by 마을지기 posted Jan 2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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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날 2008-01-24
실린날 2007-12-06
출처 다음 아고라
원문 가빈아!

너네 놀이방은 왜 이러니? 느닷없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단다, 11월10일 너네 놀이방에서 아빠랑 산행을 한다고. 도대체 왜, 아빠를 가만 놔두지 않는 거냐!

가빈아!

세상 사람 모두에게 토요일이 휴무는 아니란다. 아빠가 토요일에 휴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빠 책상도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해야 한단다. 다행히 11월 10일은 니 생일이고,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기에, 부장님에게 사실대로 얘기를 했단다. 와이프가 쓰러졌다고, 그러니깐 니 엄마가 쓰러진 거다. 차마 널 쓰러드릴 수 는 없더구나. 부장님은 걱정하면서, 빨리 가보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아빠는 가벼운 마음으로 너랑 산행을 할 수 있었단다. 이건 비겁한 게 아니라 지혜라고 한단다. 조금만 비겁해지면 세상살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빈아!

이런 날은 엄마들이 김밥 같은 걸 싸잖니? 출발 전에 소풍 가방을 열어 보았단다. 김밥 대신 빵과 우유가 가방 한쪽에 다소곳이 놓여 있더라. 이 경우가 아빠가 살아오면서 가장 황당했던 경우는 아니란다. 그렇지만 최소한 두세 번째는 되는 것 같더라. 엄마가 지금까지 김밥 싸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나름대로 예상은 하고 있었단다. 그런대도 충격이 크더라. 아빠는 어쩔 수 없이 김밥헤븐에서 천 원짜리 김밥 다섯줄을 샀단다. 다른 가족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밥을 먹고 있을 때, 우리 식구들만 구석에서, 원래 빵과 우유를 좋아하는 가족인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빵과 우유를 먹고 있을 순 없잖니!

며칠 전에 엄마가 말하더라. 천 원짜리 김밥의 쌀은 중국산 찐쌀을 사용한다고. 찐쌀이 뭔지는 굳이 알 건 없단다. 하지만 중국산 생선에선 가끔 납, 나사 이런 게 나온단다. 우리나라에서 생선은 수산물이지만 중국에선 공산품일수도 있다는 얘기란다.

니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너와 엄마가 먹던 김밥과 아빠가 먹던 김밥이 달랐던 이유는, 너와 엄마가 먹던 김밥은 세현이네 엄마가 김밥을 많이 싸왔다고, 우리에게 조금 나눠 줬던 김밥이란다. 세현이네 엄마가 줬던 김밥은 너와 엄마가 먹었고, 중국산 찐쌀로 만든 김밥은 아빠가 먹었단다. 엄마는 커피까지 챙겨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하더라.

니 엄마는 무지 행복한 표정을 짓더라. 김밥을 빌어먹는 게 행복한 건지, 남편에게 찐쌀로 만든 김밥을 먹여서 행복한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 엄만 천 원짜리 김밥은 쳐다도 안보더라. 아빠가 김밥 네 줄 먹었잖니! 원래 인생은 불공평한 거라지만, 이번 경우는 만큼은 많이 먹었다고 행복한 경우는 아닌 것 같더라.

가빈아!

사람은 힘들어도 참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란다. 높은 산도 아니고, 그렇게 높게 올라갔던 것도 아닌데, 산에서 내려올 때 넌 건들건들 걷더라. 아빠가 봐도 다리 풀린 것 같더라. 엄마가 바로 한마디 하더라. "가빈이 이 자식 운동부족이야!"

아빠는 순간 당황했단다. 아빠가 당황했다는 건, 엄마 머리에 가빈이의 특별 훈련 프로그램이 작성되고 있다는 얘기란다. 그동안 엄마가 힘들어서 포기했던 수락산 등반이 다시 시작됐다는 얘기이고, 너에게 편안한 주말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랑도 같은 말이란다.

가빈아!

너의 생일이 11월 10일이잖냐! 아빠는 항상 그 부분을 감사하게 생각한단다. 별 의미는 없지만,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도 11월 10일이란다. 무슨 얘기냐 하면, 니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한 큐에 끝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케익을 한 번만 뽀개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해결된다는 것이란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아빠는 일단 잠을 좀 자고 난 뒤, 모든 일을 해치울 작정이었단다. 헌데, 세현이 엄마가 나눠줬던 김밥의 양이 적었던 모양이더라. 엄마는 레스토랑에 간다고 통보를 하더라. 난 엄마가 웃자고 한 소리인 줄 알았단다. 당연히 아빠는 활짝 웃었는데, 엄마는 웃지 않더라. 뭔가 일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엄마는 세상이 두 쪽이 나도 가야겠고, 아빠는 안 된다고 했단다. 결국 세상이 두 쪽이 나서 레스토랑에 가게 된 거란다.

이게 무슨 경우니? 너랑 엄마는 배가 고팠겠지만, 아빠의 배는 찢어지는 상황이었단다. 근데. 그런 아빠를 데리고, 어떻게 창과 칼로 식사를 하겠다는 발상을 해댄다니? 엄마는 아빠의 합리적인 열받음에 충분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란다.

가빈아!

우리 가족의 삶이 행복과 낭만으로 가득 찬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유지되는 건 아빠가 매우 착하기 때문이란다.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빠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러니 엄마한테 달라붙어서 아빠를 째려보는 행동 같은 건 웬만하면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니가 하이에나니? 산에 올라갈 땐 아빠한테 엉겨 붙어서 친한 척 하더니, 레스토랑 간다고 할 땐 엄마한테 붙어서 아빠를 역적 취급할 수가 있는 거니?

사랑하는 가빈아!

뭔가 울컥하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아빠는 가빈이와 엄마를 사랑한단다. 히히히. 뭔가 가식적인 냄새가 날것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아빠가 엄마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건 아빠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아빠가 엄마에게 뭔가를 뺏거나, 엄마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이해해라.

가빈이랑 엄마에 대한 사랑은 세트로 묶어서 사랑하는 것 정도로 해두자. 왜 있잖니! 맥주 팻트병으로 사면 병에 땅콩 붙여주는 거. 네가 맥주고 엄만 땅콩 정도로 하자구나!

가빈아 사랑해!
이야기가 좀 길기는 하지만,
아빠의 표현이 참 솔직하군요.
긴 글을 읽고 기억에 꽂힌 말
두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토요일이 휴무는 아니란다."
"우리나라에서 생선은 수산물이지만
중국에선 공산품일수도 있다는 얘기란다."

이야기마을 웃음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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