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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밟거라"

by 마을지기 posted Apr 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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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날 2005-10-04
출처 이청준, 《야윈 젖가슴》(마음산책, 2001), 36-37쪽
책본문 이웃 일본의 에도(江戶) 시대. 유럽의 가톨릭 본부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러 온 한 서양인 신부가 권부의 강요에 의해 끝내 배교(背敎)의 운명을 맞게 된다. 그 배교 의식은 그가 섬겨온 성상(聖像) 판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내려 밟는 것이다. 그러나 신부는 마지막 배교의 순간에 차마 그 예수의 얼굴을 밟을 수가 없다. 이미 수많은 배교자들의 발자국 때가 성자의 얼굴을 무참하게 더럽혀 놓았기 때문이다.

신부는 짓밟히고 더럽혀진 그 예수의 초라한 얼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수심기에 차 있는 듯한 한 가엾은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회한의 눈물만 짓고 있다. 그 때 그 사내가 슬픔과 두려움 속에 울고만 있는 신부에게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한다. "아들아, 망설이지 말고 나를 밟거라. 나는 밟히러 온 자가 아니냐. 어서 밟거라."

일본 작가 앤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요지다. 지난 80년대 초반, 그 엄청난 정치적 억압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뼈저린 무력감과 자기 고백적 죄책감에 억눌려 지낼 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그 성인의 큰 사랑과 용서 앞에 더없는 위로와 위안을 얻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가 문학작품 속에서 만난 예수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생명이 없는 성상(聖像)이지만
성상 속의 예수님께서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시지 않고 "나를 밟거라"라고 하셨다니
예수님의 마음이 바다보다 더 넓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예수님은 원래 그런 분이니까' 하고
밟아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겠다' 하는
각오를 다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마을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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