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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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20-05-23 05: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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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잠언 19:17 
설교일 2020-05-24 
설교장소 구미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성서 본문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잠언 19:17

 

들어가는 이야기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슬금슬금 늘어나더니 급기야 우리 지역에서도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구미시에 있는 어느 교회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급하게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날씨는 상당히 좋습니다. 이상기온이라고 할 만한, 때 이른 무더위도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5월에도 낮 기온이 30도를 넘었던 적이 꽤 있었습니다만, 올해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비도 적당하게 내려주고 있고요. 봄만 되면 극성을 부렸던 황사와 미세먼지도 이번에는 비교적 얌전한 편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인터넷 생방송을 통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위에 성령님의 신선하고도 세찬 기운이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는 그를 아는가?

 

몇 년 전의 일입니다만, 어느 휴일 오전이었습니다. 아파트의 경비원이 순찰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뭔가 둔탁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뛰어가 보니까, 아는 남자가 화단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급하게 그 집으로 올라가서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그의 아내가 나왔습니다. 경비원은 엉겁결에 물었습니다. “아저씨 어디 계세요?”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그이 안방에 있는데요.” 남편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그 순간에, 아내는 남편이 안방에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해냄출판사, 2018), 전자책 391/505. 아마도 남자의 아내는, 세상에서 자기가 남편에 대해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고 삽니다. 아내나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도 내가 생각하는 아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큰 불행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10:14-15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란 어떤 목자인가, 거기에 대해서도 답을 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내 양을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양을 아는 목자가 선한 목자라는 말씀이에요. 여기서 안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기노스코’(ginosko)인데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니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겠지요. 히브리말로 안다라는 말은 야다’(yada)입니다. 히브리말의 야다, 저 사람이 김 씨인지 박 씨인지 그걸 분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문제인 대통령 아시지요? 저도 압니다. 그런데 저는 이분과 밥 한 끼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차도 한 잔 같이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안다는 것은,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C등급입니다. 그냥 식별의 수준이에요. B등급은 이런 겁니다. 우리가 누구를 소개할 때 아는 형또는 아는 동생,’ 이런 표현을 가끔 쓰지요. 그겁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부딪치거나 만나는 사람, 이런 식으로 아는 것이 B등급입니다. 그렇다면 A등급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아주 친밀하게 아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말로, “내가 그 여자를 잘 알지!”라고 할 때 그 뜻은, 나는 그 여자와 스스럼없이 섹스까지도 하는 사이다, 정확히 그런 뜻입니다. 이게 야다예요.

 

퇴근길에 받은 전화

 

예수님께서 양들을 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남의 양인지 내 양인지 식별해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에 양을 몰고 나갔다가 저녁때 들어올 정도로 자주 본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겠습니까? 생사고락을 같이 할 만큼 공동운명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나는 양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정도가 될 때 안다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을 잘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잘 아십니까? 여러분의 아내를, 또는 남편을 잘 아십니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껍데기만 알면서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사람은 겉으로만 보면 잘 모릅니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정치인의 조카가 자기 이모부에 대해서 인스타그램에 글을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정치인, 누군지 대놓고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름만 대면 여러분도 다 아는 사람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금요일, 정말 바빴던 한 주를 보내고 파김치가 되어서 퇴근을 할 때였습니다. 이모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 조카가 대답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회사 다니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러자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말이야.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 그게 얼마나 애써야 가능한 건지 내가 잘 안다. 네가 그냥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얼마나 사연이 많겠니? 남한테 말하기는 그렇고 너만 아는 이야기가 참 많이 있을 거야. 수고해라. 다음에 보자!” 전화를 끊을 때 눈물이 났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심지어 자기 부모님조차도, 자기가 아무 탈 없이 잘 산다고만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서 직장을 다닌다니까, 누구나 다 하는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게 어디 그렇게 단순합니까? 그동안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불안할 때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된 나날들이었습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지만 이모부가 그걸 알아준 거예요. 그래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건 혼자만 압니다. 이 젊은이는 조그마한 아파트 재계약할 때마다 전세 보증금을 올려 달라는 주인의 말이 너무 버거웠습니다. 회사에서 계약직 사원들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할 때는 자기가 더 참담했습니다.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도, 이런 저런 일로 시달시고 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 회사생활 아닙니까?

 

젖으며 피는 꽃

 

사람 사는 게 다 이래요. 아이들, 저런 아이들이 무슨 걱정이 있을까,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도, 혼자만의 고민과 걱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직장인들도 그렇습니다. 남들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직장을 잡아서 매일 여상하게 출퇴근을 하며 사는 것 같지만, 그런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지, 남들은 잘 모릅니다. 사업이나 장사도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중소기업이나 가게 하나를 꾸려서 망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해나가는 것, 그게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 사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모릅니다. 취업 준비생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 밑에서 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그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그게 얼마나 처절한 삶인지, 본인만 압니다. 크게 출세를 하고, 대 스타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더라도, 그냥 소시민으로서 평범함을 유지한다는 것, 튀지 않게 일상을 이어간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때가 돼서 학교를 졸업하고, 때가 돼서 취직을 하고, 때가 돼서 결혼을 하고, 때가 돼서 아이를 낳고, 때가 돼서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고, 때가 돼서 자식들 공부 시키고, 때가 돼서 그 자식들이 취직하고 결혼까지 해서 아이를 가지는 것을 보고, 얼마나 평범합니까?

 

남들이 다 그렇게 하고 사는 것 같지만, 그런 평범한 삶을 위해서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몸부림을 쳐야 한다는 것, 다 아시잖아요. 우리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삽니다. 그걸 머리로만, 그저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인 것처럼, 아픔도 함께 느끼면서 알아야 합니다. 그게 야다에요.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없습니다. 젖지 않고 피는 꽃 또한 없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들이 때가 되면 저절로 피는 것 같지만, 어느 꽃 하나도 쉽게 피는 꽃은 없습니다.

 

맺는 이야기

 

 

잠언 19:17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우리가 반드시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가난한 사람을 찾습니다. 찾아야지요. 그분들을 도와야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불쌍한 것은 아닙니다. 주변에 사람이 들끓는 것 같아도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남모르게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시는 안 나지만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 괴로워하는 사람의 고통을 나누어 함께 지는 것, 두려움에 떠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꾸어 드리면서 사십시오.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갚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101 내 인생 광내기
1100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1099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1098 벌거벗은 이사야
1097 사무엘처럼
1096 안디옥 공동체
1095 주님의 문
1094 아기야, 칼이 되어라!
1093 성령의 언어
1092 왜 어린이를 복되다 하는가?
1091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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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 내가 이 일을 지체 없이 이루겠다!
1088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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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3 믿음의 어머니들
1082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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