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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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나서 4:1-4 
설교일 2020-07-12 
설교장소 구미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

 

― 요나서 4:1-4 ―

 

■ 들어가는 이야기

 

오늘 말씀의 제목이 조금 도전적이지요? “진화하시겠습니까, 도태되시겠습니까?” 어떤 답을 기대하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는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한 순간도 끊임이 없이 성령님께서 생명의 기운과 우주의 에너지를 충만히 공급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생존과 도태의 길목

 

“진화하시겠습니까, 도태되시겠습니까?” ‘도태’(淘汰)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그 뜻이 이렇습니다. ‘생물 집단에서 환경이나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체군(個體群)이 사라져 없어지는 일.’ 어떤 생물체든지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고 적응하지 못하면 종(種)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그런 말입니다. 긴 세월 동안의 자연 역사에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짧은 세월을 사는 각각의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사람이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닌 상태가 됩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산송장’이 되는 것이지요. 목숨은 살아 있지만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까? 얼마나 많은 시련이 닥칩니까? 그런 일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 어떻게 대응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전에 언젠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사람은 시련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에 대처하는 태도 때문에 망한다.” 아무리 큰 시련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대응만 잘하면 무사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련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 2020년 상반기 동안 우리는 전대미문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전 세계가 전염병 때문에 몸살을 앓았던 일은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몇 백 년 만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하는 재난입니다. 아직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비교적 대응을 잘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끝까지 대응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여러 업종이 고전하고 있지요. 항공업체나 여행업체들이 직격탄을 맞았고요, 전반적으로 경제지표들이 다 떨어졌습니다. 장사가 되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의외인 것은, 병원들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 어느 때보다도 병자가 많은 때니까 병원이 북적일 것 같은데, 안 그렇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올해 초부터 개인위생과 거리두기, 마르고 닳도록 강조했잖아요. 손을 자주 씻어라, 사람과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있는 상황을 피해라, 등등,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감염 질병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질병관리본부가 감염병 현황을 집계해봤더니,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급성 호흡기 감염병 입원환자가 올해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3명에 불과했습니다. 감기보다 좀 더 심해서 종합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수입니다. 이게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2046명이 발생했던 거예요. 그밖에 수두, 눈병, 식중독, 일반적인 감기 등도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코로나라는 괴물에 대처를 잘하니까 이런 부수적인 긍정효과도 생겼습니다. 주범인 코로나-19도 조만간에 잡힐 것으로 기대합니다. 대응이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 니느웨 시민과 요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라고 하는 예언자 잘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얘, 요나야, 너 니느웨로 좀 가야겠다. 그 사람들이 말썽이야. 도무지 내 말을 안 들어. 그러다가는 망할 텐데 말이야. 네가 가서 경고 좀 해야겠다.” 요나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어디다가 쓸까, 싶었습니다. 워낙 나쁜 인간들이라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이고, 하나님! 거기는 안 가는 게 낫습니다. 그 사람들, 구제불능이에요.” 그러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을 쳐서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탔지요. 그런데 배가 항구를 출발한 지 얼마 쯤 됐을까요, 갑자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됐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다 죽겠다, 싶어서 선원들이 짐부터 바다에 던졌습니다. 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지요. 그래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배에 수상한 놈이 타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색출을 시작했습니다. 요나가 덜컥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배를 탔다는 사실이 발각됐습니다. 아니, 어쩌자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는 말이냐, 네가 우리 대신에 좀 죽어줘야겠다, 하면서 요나를 버쩍 들어서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침 그 옆을 헤엄쳐 지나가던 집채만 한 물고기가 요나를 꿀꺽 삼켰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니 사람이 견딜 수가 있습니까? 그 안에서 난리굿을 벌였겠지요. 하나님, 제발 살려만 주세요, 기도도 했습니다. 뱃속에서 사람 하나가 그러고 있으니 물고기인들 편하겠습니까? 견디다 못한 물고기가 바닷가 모래사장 가까이에서 요나를 토해버렸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지요. 요나는 그제야 니느웨로 갔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가기는 갔는데, 저것들, 아무리 봐도 개과천선은 힘들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까,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요. 요나는 그런 마음으로 니느웨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사십 일 뒤에 니느웨는 망한다!” “사십 일 뒤에 니느웨는 망한다!” 요즘 골목마다 트럭 끌고 다니면서 장사하시는 분들 있지요.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하면서 다니지 않습니까? 요나도 그렇게 했습니다. “사십 일 뒤에 니느웨는 망한다!” “사십 일 뒤에 니느웨는 망한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니느웨 시민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거 빈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임금부터 시작해서 모든 시민들이 회개운동, 쇄신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 변화에 대한 대응

 

요나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화가 솟구치는 거예요. 하나님한테 혼나서,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나는데…, 그런 울화병에는 남 망하는 게 약이 되기도 하잖아요. 니느웨 망하는 꼴을 보면 스트레스가 좀 풀릴 것 같은데, 그것조차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씩씩거리면서 하나님한테 대들었습니다. “거 보세요, 하나님! 어차피 이렇게 니느웨를 살려주실 거잖아요. 그럴 거면 그냥 살려주시면 되지, 뭐 하러 저한테 이 고생을 시키세요?” 그러면서 산으로 가서 조그마한 원두막 하나를 짓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보니까 햇볕은 쨍쨍 내리쬐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덥지가 않은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박 넝쿨이 벽도 없는 원두막을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다음날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룻밤을 더 자고 일어났더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뭐야, 하면서 봤지요. 보니까, 벌레란 놈이 박 넝쿨을 다 갉아먹어 버린 겁니다. “아이 씨, 성질나서 못 살겠네!” 욕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요나서 4:9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요나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게 됐는데, 여기서, 요나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니라 스페인으로 간 거요? 당연히 잘못이지요.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아주 큰 잘못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요나는 변화를 읽어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환경이 변한 것을 감지해내지 못했어요. 요나가, 건성으로 떠들었든지 진심으로 외쳤든지, 니느웨 시민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게 됐어요. 이게 변화입니다. 요나가 볼 때 니느웨는 망해야 정상인 도시입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그랬어요. 망해야 마땅할 정도로 죄악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바뀌었습니다. 회개하고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지금은, 옛날 니느웨가 아닙니다. 요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 맺는 이야기

 

우리 주변 나라들의 사정을 봅시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인식 속에는 어떻게 그려져 있습니까? 미개하고, 후진적이고, 더럽고, 느리고… 등등,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렇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중국이 얼마나 눈부시게 변화했는지 아십니까? 정보관련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현금보다 스마트폰 결제가 표준이 되어 있고요, 심지어 거지들도 목에다가 QR코드를 달고 다닙니다. 현금 주지 말고 폰으로 찍어서 적선하라는 거죠. 거지까지 QR코드로 디지털 금융을 실제 생활에 이용하는 나라가 중국입니다. 옛날 중국이 아니에요.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중국을 무시해요. 아직도 한국을 자기들보다 못한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와 도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혁신하지 않으면 일본은 머지않아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하고 경쟁하는 저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빠른 시간 안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빅 데이터의 근본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날마다 발전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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