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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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6-06-11 1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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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16:9-14 
설교일 2006-06-11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야스엘이 울듯이, 내가 통곡한다.
말라 비틀어진 십마의 포도나무를 두고 통곡한다.
헤스본아, 엘르알레야, 나의 눈물이 너를 적신다.
여름 과일과 농작물을 거두는
너의 흥겨운 소리가 너에게서 그쳤구나.

“이제 기름진 밭에서 기쁨도 사라지고 즐거움도 사라졌다.
포도원에서 노랫소리가 나지 않고,
기뻐 떠드는 소리도 나지 않고,
포도주틀에는 포도를 밟는 사람도 없다.
내가 그 흥겨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다.”

모압을 생각하니,
나의 심장이 수금 줄이 튀듯 떨리고,
길하레셋을 생각하니,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모압 백성이 산당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고,
그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전에 주님께서 모압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삼 년 기한으로 머슴살이를 하게 된 머슴이 그 햇수를 세듯이, 이제 내가 삼 년을 센다. 삼 년 안에 모압의 영화가 그 큰 무리와 함께 모두 능욕을 당할 것이며, 남은 사람이라야 얼마 되지 않아, 보잘 것이 없을 것이다.”

(이사야서 16:9-14)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3)


■ 들어가는 말씀

이사야는 모압 사람들을 두고 이런 탄식을 했습니다. “모압을 생각하니, 나의 심장이 수금 줄이 튀듯 떨리고, 길하레셋을 생각하니,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모압 백성이 산당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고, 그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이사야서 16:11-12).

여기서 ‘나’가 이사야 자신을 말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전하는 예언자니까, 이게 이사야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장이 수금 줄이 튀듯 떨리고, 하나님의 창자가 뒤틀린다고 했습니다. 이거 우리말로 하면 뭡니까? 환장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압을 보시고 왜 환장할 지경이 되었습니까? 그 사람들하고 대화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과 말은 주고받는데, 대화가 안 되면, 서로 통하지 않으면, 내 말을 저쪽에서 알아듣지 못하면, 그야말로 환장하는 것이지요.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쫄딱 망할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말이 통하지 않으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 년 예수를 믿었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헛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헛된’ 기도를 쓸데없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참된’ 기도를 드려서, 기도하는 대로 응답 받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먼저, 기도의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이 말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가, 엉뚱한 데다 드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했는데, 하늘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달나라에 계십니까? 화성에 계십니까? 태양계 너머 은하계에 계십니까? 아니면 안드로메다쯤에 계십니까? 이것은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이란 게 무엇입니까? 예전에 김지하 시인이 그랬지요.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우리가 서로 나누어 가지듯이, 밥도 나누어먹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늘이라는 것은 달이 뜨고 별이 뜨는 우주공간 중의 한 지점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 ‘하늘’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성지(聖地)로 삼는 종교가 세 개입니다. 우리가 아는 구약의 하나님, 곧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가 있고, 예수님께서 새롭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교가 있고, 알라 신을 섬기는 이슬람교가 있습니다. 이 세 종교는 모두 뿌리가 같습니다.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각기 그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 다릅니다. 이름도 다릅니다. 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라고 합니다. 이게 다 같은 분이에요. 다른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도 믿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와는 원수처럼 지냅니다. 무슬림들도 마찬가지지요. 유대교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대적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멀리하고, 십자군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무슬림들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 세 종교 사람들이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은 같은 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머리가 아프시겠습니까? 자식이 셋 있는데 각기 자기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원수처럼 자기들끼리 으르렁대고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나의’ 아버지도 아니고, ‘너의’ 아버지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세상 만물의 근원이신 절대자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무슬림들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하나님,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건 불교나 힌두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야 합니다. 무슬림을 치시는 하나님, 유대인을 벌하시는 하나님, 불교인을 남의 자식이라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제대로 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포함하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모압 사람들이 잘못된 게 무엇입니까?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압 백성이 산당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고, 그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 산당에 가서, 자기들만이 신으로 생각하는 대상에 기도하니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나만의 하나님,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나님, 내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고, 만민을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크고 크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헛된 기도가 아니라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2. 그 다음, 두 번째로, 기도의 방법은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가, 하나님께 떼를 쓰는가, 하나님께 억지를 부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즘 월드컵 축구 열기가 뜨겁습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나라 국가대표 팀의 히딩크 감독이 영웅이 되었었지요. 이 양반이 한 일 가운데 재미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국가대표 팀이 연습을 할 때나 경기를 할 때, 선후배의 벽을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유유서의 문화에 익숙해 있어서 선후배를 많이 따지지요. 한 살만 많아도 선배 대접을 해야 합니다. 특히 운동선수들에게는 그게 더 심합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그걸 깨버리고, 사석이 아닌 경기장에서는 선배고, 후배고 따지지 말고 모두 이름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영표!’ ‘지성!’ ‘명보!’ 하는 식이지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대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그 시끄러운 경기장에서 격식 차리다가는 작전 수행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후배를 부를 때는 ‘천수야!’ ‘종국아!’ 이렇게 부르면 문제가 아닌데, 선배를 부를 때 ‘선홍이 형님!’ ‘이운재 형님!’ 이러다가는 공 다 뺏기지 않겠습니까?

선배가 후배에게 지시하고, 후배는 선배 눈치를 보는 그런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자기 포지션에 따라, 지금 처한 상황에 따라서 수평적 대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쓴 겁니다. 그 당시에 차범근 해설위원도 해설을 하면서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선수들끼리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면서 소리만 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뜻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는 식으로 쌍방통행의 대화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기는 해요. 그런데 평소에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할 때만 찾아가서 불쑥 손을 내민다는 겁니다. 그리고 꼭 급할 때만 하나님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해요. 이건 좀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신앙인입니다. 평소에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고, 달라고 안 해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저 필요할 때만 와서 손을 벌리고서는,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대요. 세상에 이런 못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대화를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가 점점 메말라서 심각한 지경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부부간에 한 열흘만 입 닫고 말 안하고 지내보세요. 하긴 필요한 말은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말’ 말고 ‘대화’가 없으면 부부사이가 심각해집니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신앙인은 ‘황폐한’ 신앙인입니다. 기도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꾸준하게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를 하다가 나태해져서 되는 대로 살 때,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당장에 표시는 안 날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있는 대로 ‘황폐’해집니다. 얼마나 삭막해지는지 모릅니다. 그거, 볼 줄 아는 사람은 눈에 보입니다.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생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를 중단하면, 옆에서 보기에도 ‘멍’해 보입니다. 어디 정신 놓고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다가 사고치는 거예요.

기도를 중단하는 것, 곧 하나님과 대화를 중단하고 사는 것은 오염된 공기를 계속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중금속이 득시글거리는 음식을 먹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우리 몸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산소가 제대로 공급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에는 표시가 안 날지 모르지만, 산소 부족 증세가 머지않아 나타납니다. 신앙의 아토피에 걸리고, 신앙의 무기력증에 걸린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해서, 하나님과 대화하십시오. 기도보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기도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아쉬울 때만,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신앙인의 도리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예의도 아닙니다. 헛된 기도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참된 기도는 평소에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확실한 정답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4장 2절에서 3절까지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쾌락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헛된 기도라는 말입니다. 왜 헛된 기도입니까?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니까, 그것은 허공에 외치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쾌락’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쾌락이 있어야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쾌락, 또는 기쁨이 쾌락 자체로 끝난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쾌락일 때,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저에게 기쁨을 주십시오! 제가 기뻐야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쾌락을 구하더라도 적어도 이런 정도의 기도는 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배고파 기진맥진하면, 어떻게 주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감당하겠습니까? 제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돈이 없어서 이리저리 꾸러 다니고, 얻으러 다니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일한 만큼, 거두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웃집에서 이번에 그랜저를 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의 자녀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저에게 에쿠스를 주십시오!” “하나님, 그 동안 소주를 마셨는데, 그게 영 맛이 없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30년 이상 된 고급 양주를 마시게 해주십시오!” 요런 기도는 헛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과 개인의 쾌락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헛된 기도입니다.

■ 맺는 말씀

오늘 저는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나만의 하나님, 우리 집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하나님, 온 우주의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둘째는, 아쉬울 때만, 급할 때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과 긴밀하게 대화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끝으로, 내 개인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허무한 게 헛손질이고, 헛발질입니다. 반응 없는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입으로만 부르짖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헛된’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대로 척척 이루어지는 ‘참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21 평화의 씨앗이 되게 해주십시오!
1020 평화와 밥
1019 평화에 평화를, 복에 복을!
1018 평화 만들기, 세 가지 방법
1017 평화 만들기
1016 평화 마인드, 대결 마인드
1015 평생을 좋은 것으로 흡족히 채워주시는 분
1014 편안함을 주는 사람
1013 편안한 후회
1012 편안한 마음가짐을 위하여
1011 편안한 곳에서 안전하고 배부르게!
1010 판단력 업그레이드, 엔터!
1009 투명인간
1008 터질듯 한 벅찬 가슴
1007 탐욕에 대하여
1006 탈출하라!
1005 큰 효력을 내는 기도
1004 큰 인물이 될 싹
1003 큰 인물이 되기 위한 요건
1002 큰 기쁨이 넘치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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