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전대환 채널 바로가기

마을지기 2007-05-21 14:31:44
0 6409
성서본문 출애굽기 32:15-20 
설교일 2007-05-20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모세는 돌아서서 증거판 둘을 손에 들고서 산에서 내려왔다. 이 두 판에는 글이 새겨 있는데, 앞뒤에 다 새겨 있었다. 그 판은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자는 하나님이 손수 판에 새기신 글자이다.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 모세에게 말하였다. “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승전가도 아니고, 패전의 탄식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다.

■ 들어가는 말씀

오늘 말씀의 제목을 “외롭지만 있었다”로 붙였는데, 이것은 구상 선생님이 쓰신 시 “출애굽기 별장(別章)”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 시를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각설(却說), 이때에 저들도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

믿음이나 진실, 사랑과 같은
인간살이의 막중한 필수품들은
낡은 지팡이나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서로 다투어 사람의 탈만 쓴
짐승들이 되어갔다.

세상은 아론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아예 노예근성이 꼬리를 쳤다.

그 속에도 시나이산에서 내려올
모세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외롭지만 있었다.

자유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후유, 멀고 험하기도 하다.

― 구상, 《홀로와 더불어》(황금북, 2002), 43쪽.


■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서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백성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내 산으로 올라가고 없었습니다. 산에 올라간 모세는 40일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내려오지 않습니다. 기다리던 백성들은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몰려가서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 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십시오.” 모든 백성이 자기들 귀에 단 금 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습니다. 아론은 그것들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그 앞에서 잔치를 열고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들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어놀았습니다.

한편, 산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모세는 주님의 율법이 적힌 돌판 두 개를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모세의 부관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세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승전가도 아니고, 패전의 탄식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까,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화가 난 모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구상 시인은 이 장면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은 아론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아예 노예근성이 꼬리를 쳤다.” 당시의 대세는 ‘아론’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러지 말고 모세를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 시인은 추측을 해봅니다. “그 속에도 시나이산에서 내려올 모세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외롭지만 있었다.”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의와 소신을 지킨 사람들이 ‘외롭지만’ 있었을 것이라는 시입니다.

■ 예수님의 친구들

예수님이 잘 나갈 때 그렇게 열광하던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대세를 따라서, 예수님을 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 편이 되었던 사람들이 ‘외롭지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옆 십자가에 함께 달렸던 강도가 그런 사람이고, 자기가 쓰려고 준비했던 무덤을 예수님께 드렸던 아리마대 요셉이 그런 사람이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을 발라드리려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날 때, 오히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를 버렸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비록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기는 했지만, 베드로도 틀림없이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라, 담대함이 부족해서 그랬지,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야 다들 잘 지내고 친한 것 같겠지만, 과연 내가 위기에 몰렸을 때,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비난하고 나를 떠날 때도, 오히려 나를 찾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정이 중요하고 가족이 소중하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나를 버려도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올 사람들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에 못지않은 친구도 있기는 있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겠습니다만, 옛날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에, 집안일은 하지 않고 밖으로만 나도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와서는 한나절이 되도록 잠만 자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타일렀습니다. “얘야,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너무 심하지 않니? 그리고 네가 만나는 친구들이 제대로 된 친구이긴 한 거냐?” 그러나 아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온 아들에게 말합니다. 마당에는 피 묻은 거적이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얘야, 내가 어떻게 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너는 친구들이 많으니, 혹시 좋은 방책을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을 수 있겠구나. 함께 가서 물어보자.” 이렇게 말하면서 거적을 지게에 얹어 아들에게 지우고, 친구 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말도 제대로 못 꺼내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지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할 수 없구나. 내 친구에게라도 찾아가서 한 번 물어봐야겠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아버지의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친구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걱정하며 살인자 부자(父子)를 맞아들였습니다.

옛날에는 동네에서 살인이 나면, 살인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까지도 그 동네에서 살지 못합니다. 살인을 공모한 사람이나 시체유기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이고, 살인자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까지도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지요. 살인자와 관련이 된 사람을 철저히 가려서 동네에서 축출했습니다. 그런 씨족사회에서 피살자의 시체를 집안에 들이고, 살인자를 도와 대책을 의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친구는 기꺼이 ‘외로울’ 각오를 한 것입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거적을 풀어헤칩니다. 거기에는 돼지가 한 마리 있었고, 그 자리에서 돼지를 삶아 함께 나누어먹으며 즐거워했다, 여기까지가 스토리입니다.


■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를 돌로 치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세리 삭개오, 순 도둑놈이라고, 순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그였지만, 예수님은 그의 집을 찾아가 함께 밥을 잡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질겁하던 문둥병자들, 예수님은 그들을 친구 삼아, 그들의 병까지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은 분이셨습니다. 안 먹으면 배고프고, 때리면 아프고, 모욕하면 속상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외롭지만 있었다.’ 남에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대세를 따르지 않고, 사랑의 길, 정의의 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택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외롭지만’ 있었던, 그런 분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며, 주님의 승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당신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사역을 마무리하신 것이지요. 이제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사실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당부하셨습니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누가복음서 24:49).

‘나 없다고 옛날처럼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라. 나는 이제 사라지지만,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낼 터이니 그 때까지 여기 머물러 있어라’ 이 말입니다. ‘나는 이제 내 갈 곳으로 간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내 하던 일을 이어 받아라’ 그런 당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란 게 뭡니까? ‘외롭지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 ‘외롭지만’ 정의의 편에 서는 것, ‘외롭지만’ 신의를 지키는 것, ‘외롭지만’ 약자의 편에 서는 것,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 맺는 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예수님의 뜻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신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남들처럼 적당히 예수 믿고 복이나 받아보자’ 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신 것은 더 좁은 문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비록 외로울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은 가장 좁은 문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기까지 그 자리에 꼭 머물러 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 같은 사람이 있어서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바뀌어 갈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1100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1099 벌거숭이가 됩시다
1098 칼 이야기
1097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1096 예배와 봉사, 무엇이 먼저인가?
1095 고향으로 가자
1094 "애써 주님을 알자!"
1093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92 의로운 백성, 비틀거리는 백성
1091 생각에서 행동까지
1090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
1089 새내기들의 다짐
1088 하나님 어머니
1087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1086 주머니가 구멍난 까닭
1085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1084 노예로 살기, 주인으로 살기
1083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1082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1081 “신을 벗어라!”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