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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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7-10-28 13: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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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계시록 15:1-4 
설교일 2007-10-28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기념주일 

■ 성서 본문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크고도 놀라운 또 다른 표징을 하나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재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짐승 우상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긴 사람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도 참되십니다.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5:1-4〉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은 종교개혁 49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 ~ 1546.2.18)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글을 대자보로 붙임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이 대자보에다가 95개의 논제를 적었습니다. 당시 교황과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 종교개혁 시대의 우상

이 논제들을 읽어보면 ‘면죄부’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죄 사함 증명서’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을 구해서 들고 있으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죄를 위해서 면죄부를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간에 나도는 이야기로는, “여러분의 헌금이 헌금 통에 떨어지면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연옥에 가 있던 여러분의 조상이 죄 사함을 받아 천국으로 올라간다!” 하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게 다 돈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교황이 레오 10세였는데, 이 양반이 벌린 일 가운데 큰일이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순교한 바로 그 자리에다가 교회를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짓자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헌금 가지고는 모자라니까, 교황 레오 10세가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죄를 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현찰 박치기’를 추가한 것입니다.

당시 독일 교회에서 사죄 문제 담당 추기경이었던 알베르트(Albert) 대주교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발표했던 교서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 과거에 범한 죄를 참회한 후,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한다. 둘째, 적어도 지정된 일곱 성당을 순례하고 성당 순례 때마다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곧 십자가에서 못 박힌 양손과 양발 그리고 창으로 찔린 옆구리의 상처, 이 다섯 군데의 상처를 묵상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차례씩 외우든지, 또는 시편 50편을 외워야 한다. 셋째,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비로 일정 금액을 헌금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3번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을 달았습니다. “천국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나 단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실천한다는 조건하에서 먼저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는 헌금 수령 증서를 주었습니다. 이 증서를 가진 사람은 고해성사를 할 신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 헌금 수령증서가 와전되어서 ‘면죄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지요.

그런데, 문서야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현장에 내려오면 그게 그렇게 됩니까? 돈 내면 죄 사함을 받는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어버린 것이고, 실제로 그것이 ‘면죄부’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생긴 제도이기 때문에, ‘실적’ 문제도 있는 것이고, 유럽 각처에서 돈 걷기 경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되니까 교회가 당연히 부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해야 할 교회에서 온갖 추악한 짓거리가 나오니까, 이 꼴을 보다 못한 마르틴 루터가, ‘우리 공개적으로 토론 한 번 해봅시다!’ 해서 95개조 논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오늘날의 우상

“돈이 원수!”라고 하지요. 중세교회 때도 그랬습니다만, ‘돈’이 전면에 등장하면 교회고, 사회고, 거기가 막장입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앞서 나오면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돈이 있어서 나쁠 것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제가 보기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잃어버리는 것도 많은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 ‘겸손’을 잃어버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예전에 우리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집에 찾아와서 하룻밤 묵어가자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선산 살 땐데, 초등학교 시절이었지요. 부모님과 함께 대구에 갔다가 밤이 늦었습니다. 기차 타고 구미까지만 가면 무슨 방법이 있겠지, 하면서 구미까지 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선산까지 갈 방법이 없는 겁니다. 밤은 깊었는데, 50리 깃을 걸어가는 것도 무리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구이역 앞에 어떤 민가로 찾아갔습니다. 구미역에서 길을 건너서 오른쪽 길을 따라 세 번째 집인지, 네 번째 집인지, 그랬습니다.

“실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인데, 날이 늦어서 차가 없습니다. 혹시 하룻밤 신세 좀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얼른 들어오라는 거예요. 들어가서 늦은 저녁밥을 한 상 얻어먹고, 저는 그 댁 주인어른 앞에 꿇어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인생의 지혜를 배웠지요. 그러고 나서 그 어른은 며느리를 시켜서 잠자리를 봐주게 했는데, 이부자리가 얼마나 정갈하던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합니다.

만일 그 당시에, 주머니에 돈이 있고, 요즘처럼 호텔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호텔이 들어갈 때, 머리를 조아리며, “실례지만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지요. 호텔에 들어가서 호텔 주인 앞에 꿇어앉아 훈계를 듣는다든지, 하룻밤 재워주는 것이 그저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한 끼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내 돈 주고 내가 서비스를 받는데, 겸손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스님들이 탁발을 하지요. 바랑을 짊어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곡식을 얻으러 다닙니다. 이것은 스님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행과정인데, 스님들이 그렇게 하는 건, 곡식 모으러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을 배우는 ‘수행’입니다. 아이들한테 놀림도 받고, 개한테 물리기도 하고, 못된 집주인들한테 얻어맞기도 하고…. 그러면서 겸손을 배우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버리고 원시인처럼 살자, 그런 이야기냐,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발 순서는 좀 알고 살자는 것이지요. 사람이 먼저냐, 돈이 먼저냐, 만일 길을 막고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도 돈이 먼저라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러면 뭐 합니까? 문제는 과연 그 사람들이 자기 ‘말’대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제를 고발하고, 친구를 팔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모두 ‘순서’를 무시한 결과입니다. ― 이현주,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바오로딸, 1999), 42쪽.

■ 하나님 먼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까, 돈이 먼저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하나 같이 모두 ‘하나님이 먼저’라고 대답하겠지요. 그런데 현실이 어디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먼저’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은, 순서로 보면 둘째, 셋째, 아니, 그 이하로 밀려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약속이 중복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우선순위를 따져서 제일 중요하지 않은 약속부터 취소시켜 나가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일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예배시간은 빼먹어도 되는 일순위의 약속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에게 하나님이 한참 밀려나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누가복음서 16: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이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더 사랑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헌금 많이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50편 8절에서 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바친 제물을 두고 너희를 탓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늘 번제를 바쳤다. 너희 집에 있는 수소나 너희 가축우리에 있는 숫염소가 내게는 필요 없다. 숲 속의 뭇 짐승이 다 나의 것이요, 수많은 산짐승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산에 있는 저 모든 새도 내가 다 알고 있고, 들에서 움직이는 저 모든 생물도 다 내 품 안에 있다.”

이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돈 바치라고 하시겠습니까? 시편 51편 17절에서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가슴 아프고 한스러운 마음을 주님께 가져와서 바치라는 말입니다. 돈으로 해결하려고 쓸데없이 기 쓰지 말고 주님 앞으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데 왜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지요. 옛날에 거창고등학교에 전영창 선생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1956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다 쓰러져가는 빚더미 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와서 보니 학교 꼴이 한심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꿇어 엎드려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거창에 돈을 벌려고 왔소? 아니면 내 명예를 위해서 왔소?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이 보내서 왔지. 그런데 왜 학교를 운영할만한 돈을 주지 않습니까? 왜 빚을 갚도록 돈을 보내주지 않습니까? 만약 빚을 못 갚아서 제가 거창서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나가면 누가 더 창피하겠소? 하나님이 더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제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 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종로서적, 1996), 15쪽.

그래서 어떻게 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돈다발을 내려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돈을 주셨을 것 같으면, 우리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돈 좀 달라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지만 돈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나중에 이분은 기도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 제 빚을 다 갚아주시든지 갚아주시지 않든지, 거창고등학교에서 일을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거창고등학교가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영창 선생의 손길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신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뭐든지 다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자녀에게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있는 것, 없는 것, 다 퍼주고 싶은 것이 부모 심정 아닙니까?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돈이든, 복이든,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철저히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돈을 주면, 그것은 돈이 아니라 독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활동을 시작하실 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죄가 커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당시의 세례는 사람을 머리끝까지 물속에 완전히 집어넣었다가 건져내는 것이었습니다. 물이란 게 어떻습니까?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이 있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물속에 잠긴다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낮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야에게 병을 고치러 왔을 때, 엘리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다보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물속에 처박혔다가 나오시오.’ 나아만 장군이 펄펄 뛰었습니다. 천하의 나아만 장군을 이렇게 대접할 수는 없다, 이거였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 아무리 뛰어나고 잘난 인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거꾸러지지 않으면 새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돈이 필요한 것 잘 압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축복도 잘 압니다. 저는 제발 여러분이 큰 복을 받아서, 주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돈을 벌어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바쳐야지!” “내가 먼저 돈을 벌어서 더 많이 봉사해야지!” 이런 마음은 교만함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순서가 틀린 생각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어지십시오. 먼저 하나님 앞에 찢겨진 심령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저는 죽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포기를 선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바알 신상이나 아세라 목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바로 돈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가장 잘못된 것은, 죄 사함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 앞에 거꾸러져서 나를 포기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상에 빠져서, 돈 귀신에 홀려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푼돈이나 얻어 쓰시렵니까, 아니면 나를 포기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엎어져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사시렵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겸손해져서, 주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01 내 인생 광내기
1100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1099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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