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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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8-03-09 13: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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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창세기 12:1-3 
설교일 2008-03-09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김판임 
설교구분 행사 


■ 성서 본문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1-3〉


■ 들어가는 말씀

“자랑스러운 기청”(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연합회)의 51회 정기 총회를 축하합니다. 희년총회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올해 51회 생일을 맞이하게 되니, 기청과 제가 같은 나이인 것 같습니다. 50세쯤 되면 갱년기라고 합니다. 신체적 조건에서부터 인생의 많은 것들을 예전처럼 계속할 수 없다고 실감하는 때입니다.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인식하는 때입니다. 기청 51회 총회를 희년 총회로 여는 것은 기청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각오를 표현하는 것이라 이해됩니다.

희년의 의미는 레위기 25장 10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표하라.” 50년 동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좋은 일을 도모하면서 잘 살아 왔다 해도, 또 50년간 굳어진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저와 같은 개인의 몸도 아프고, 기청과 같은 단체도 답답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있는 것이고, 희년에는 예전의 반복적 생활에서 자유롭고, 예전의 지속되던 조직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조직 체제, 새로운 지향점, 새로운 가치관을 구성해야할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청년이라 함은 20-30세 정도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자랑스러운 기청이 자랑스러운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희년정신을 발휘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새로움이란 기존 세력에 물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늙지 않는 영원한 청년이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전하며, 예수님을 따르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 예수님을 따르자.

예수님은 영원히 30대 초반의 청년입니다. 그의 생각도, 가르침도 청년의 것입니다. 청년의 특징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청년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청년은 생각이 분명합니다. 기존 세력과 합류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논리를 얽어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누가복음서 6:20), 그러나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가복음서 10:25)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하니라”(마태복음서 6:24).

예수님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부자, 가진 것이 많은 자는 구원과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구원(영생)을 원하는 사람은 가진 것을 버리고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줄 것이 있는 부자라야 영생을 얻는다고, 많이 벌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으로써 구원을 얻고, 부자도 자선으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고’(오덕호, ≪하나님이냐 돈이냐≫, 369-370). 예수님의 말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청년의 논리는 분명한데, 부자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고 싶은 기득권자를 포함하고 싶은 사람의 억지 논리로 예수의 본뜻을 흐려 놓는 해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청의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따릅시다. 청년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 따름이란 떠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떠나는 것입니다. 따름이 떠남이라는 진리는 성서에서 다양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마가복음서 1:16-20.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들의 생업의 기반인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새로 도모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돈부터 생각합니다. 재정을 어떻게 충당한단 말인가, 하고 고민합니다. 숭례문이 불타자마자 누구는 돈부터 마련할 안을 제시했습니다. 돈이면 뭐든지 다 만들어낼 수 있다는 논리에 물들어 있는 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면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고, 돈이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고, 돈이면 600년 된 문화재도 부활시킬 수 있고, 돈이면 무슨 일을 못하랴. 돈이 없어서 못하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돈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와 완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없는 것을 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가진 것을 버리는 방식입니다. 특별히 돈 벌기 위한 도구를 먼저 버립니다. 내가 해오던 직업을 버리고, 나의 삶의 안정을 제공해 주었던 아버지와 집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2) 누가복음서 9:57-62.

누군가가 찾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말씀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부자가 되는 축복의 통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집 없이 떠도는 노숙자의 삶을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삶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 따르는 삶이 노숙자의 삶이라면 누가 예수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예수 믿고 부자 됩시다!” “예수 믿고 팔자 고칩시다!” 대부분 이런 것들이 기독교의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일반인들이 좋게 여기는 것, 부귀영화를 위해 종교도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직시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현재 자본주의와 결탁한 한국 교회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이미 노숙자의 길을 따르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주님, 따르긴 따르겠는데요, 내 아버지 장례나 치르고 따르겠나이다.” “주님을 따르긴 따르겠는데요, 내 가족 친지들과 이별 식은 하고 떠나게 해주세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떠날 것을 주저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쥐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현실에 미련을 가지고 떠나지 못하면 새로운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이처럼 현재를 떠남입니다.

3) 마가복음서 10:17-22.

영생을 얻기 원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바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십계명 중 인간관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예수께 영생을 얻기 위한 방도를 물었던 사람이 대답합니다.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잘 지켰나이다.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제시하신다면, 아마 이제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을 제시할 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전혀 엉뚱한 것을 제시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사람은 재산이 많은 고로 실망하여 갔다고 이야기는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부자이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수가 없어서 그냥 갔다면, 그보다 덜 부자인 사람은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모두 겁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을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마가복음서 10:26). 한 명도 예수의 요구를 따를 사람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재산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나이가 어느 정도 된 사람이 전혀 재산이 없다거나 빚더미에 있다면 잘못 살아온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가진 것을 얼마든지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알거지가 되어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헌금을 많이 내어서 나도 잘 살고 가난한 사람들도 배불리 먹게 해주는 좋은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부자인 나도, 가난한 저들도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뜻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네 재산의 일부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을 다 주고 너 자신이 가난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철저합니다. 예수님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아무도 예수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누가 과연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가난한 자로서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따르기를 망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부자 되는 길이 아니라 노숙자가 되는 길이라면. 지금까지 든 예를 통해 보면, 예수 따름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고, 하여 아무도 그 길을 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4) 창세기 12:1-3.

이제 구약성서에서 떠남의 명령을 수행한 아브람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살펴본 예들은 예수를 따름이 현재 자신의 현재를 떠날 것에 대한 요구이고, 그 요구의 수행이 거의 비현실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람은 그 요구에 응한 사례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브람의 나이 75세일 때입니다.

고향이란 무엇입니까? 고향은 어머니 품처럼 나 자신을 편안히 내맡길 수 있는 곳이 아닙니까? “고향 땅에서는 넘어지고 자빠져도 아프지 않다.” 어떤 시인의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향이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정든 곳으로, 언제라도 푸근히 안기고 싶은 곳이지요. 친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주고 돌보아 준 존재들입니다. 낯선 사람처럼 경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아버지는 자녀의 양육과 성장을 책임지는 자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안정된 삶의 기반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직 세상천지 몰라 겁 없는 20대가 아니라, 살만큼 살아왔고, 이제 생을 마감해도 좋을 나이인 75세에 말입니다.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진 것은 오직 약속뿐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현재 삶의 기반을 떠나 막막한 미래를 향할 수 있었던 것은 미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보존하시고자 하시는 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아브람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5)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떠나야 할 것을 지적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과거, 얽매였던 것, 문자, 율법에서 떠나, 영의 자유함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성전을 지어놓고, 정해진 장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경배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자,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성서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성서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일점일획도 변경하거나 가감할 수 없고, 거룩한 문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죽이는 경우도 성서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습니다.

기록된 문서와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음은 예수님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이혼에 관한 논쟁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혼을 할 때에는 그냥 내보지 말고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신명기 24:1)이라고 토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오경, 토라는 현재 한국교인들에도 그렇지만,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이란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혼증서 없이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논쟁에서 기록된 문자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명하였느냐?”(마가복음서 10:3). 예수의 의도된 질문에 논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인간이 완악함으로 사람이 잘못 결혼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할 수 없이 기록한 것이다. 즉, 기록된 성서구절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상반된 것도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질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후 생육할 것과 번성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나타나 있다.’

성서의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것일 수 있음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 후에 그런 것들이 자주 보입니다. 가령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출애굽기 21:12)에 문자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창세기 4장에서 아우를 쳐 죽인 첫 번째 살인자 카인이라도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의 배려에서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성서의 문자에 얽매일 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자유한 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는 고린도후서 3장 6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거룩한 성서의 권위를 이용합니다. ‘여기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을 때 우리는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림”은 생명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 떠남이란 열려있는 미래(자유)를 향한 발걸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고착된 문자(주의)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영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종교적 억압, 정치적 억압,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함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죽음의 역사에서 탈출하여 생명의 역사로 옮겨 가야 합니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목사면 이래야 한다, 종교인이면 이래야 한다… 등등. 우리를 억압했던 기존의 가치관을 넘어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누가복음서 10:38-42)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초대한 마르다는 기존의 가치대로 많은 좋은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여자라는 평가를 듣고 싶어서 많은 음식들을 장만하느라 분주하고 힘에 겨웠습니다. 결국 자기를 돕지 않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는 동생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나 혼자 일하는 것이 안보입니까? 내 동생 더러 나를 도우라고 말해주세요.”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두둔하여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택하였다. 결코 그 일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가 당시 사회적 가치를 따랐다면, 마리아는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의미가 있는 일을 자유 선택하였습니다.

■ 맺는 말씀

희년, 50년간 이루어온 자랑스러운 기청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입니다. 그동안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입니까? 포기해서는 안 될 일들은 자랑스럽게 부여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청의 자랑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정의, 평화, 인권, 생명” 운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런 운동하느라고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았다고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왔습니다. 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들이나 기독교대한감리회 교회들에서는 자신들의 부족을 깨닫고 예전에 우리가 해오던 일, 약자 편에 서서 인권 운동을,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해오던 것은 버려서는 안 됩니다.

물론 타성에 젖어 굳어버린 일도 있을 겁니다. 한 자세로 고정적으로 일하면 아무리 좋은 일도 굳은살이 박여 결리고 아픕니다. 알게 모르게 굳어 버린 방식, 타성에 젖어들었던 일들은 과감히 벗어나야겠습니다. 다음 희년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자유의 행진을 시작해야 합니다. 75세에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 아브람처럼, 우리는 예수님만 믿고 따라가 봅시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청년 예수를 본받고자 한다면.

기청은 오늘 제 1희년의 날에도, 50년 후에 있을 제 2희년에도 영원히 자랑스러운 기청으로 남을 것입니다.

■ 기도

아브람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거듭난 생명을 누리오니,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동안 오직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세상 세력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깨닫고 가르쳤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청년의 기백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인 정의 평화 인권 생명의 역사를 일구는 자랑스러운 기청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101 "결혼이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1100 가시밭의 백합화
1099 헛똑똑이와 속똑똑이
1098 어여쁜 그대여, 일어나 함께 가오!
1097 오래오래 잘 사는 법
1096 멋진 남자
1095 우상을 쓸어내고 주님의 몸을 세우자
1094 청지기의 직업의식
1093 "남편 된 이 여러분!"
» 떠남과 따름
1091 주님의 뜻을 이룬 여인들
1090 "젊은이들아!"
1089 여신도여, 일어나 화해의 대로를 열어라!
1088 청년이여, 예수님을 따라가자!
1087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86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1085 주여, 이 땅을 살려 주옵소서!
1084 낡은 정신, 새 정신
1083 남성동지, 여성동지
1082 예수를 도운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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