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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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8-03-16 13: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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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시편 24:7-10 
설교일 2008-03-16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사순절 


■ 성서 본문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냐?

힘이 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전쟁의 용사이신 주님이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냐?

만군의 주님,
그분이야말로 영광의 왕이시다.
(셀라)

〈시편 24:7-10〉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주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데뷔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클라이맥스가 시작된 날입니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지금은 불타 없어져버리고 말았지만, 시골 가난한 선비가 왕이 되기 위해 숭례문을 들어선 날입니다.

시편 24편의 말씀에 보니까 시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7). 오늘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왕이 되시기 위하여 출정하시는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니까, 우리도 당연히 주님 들어가시는 문으로 따라 들어가야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이 문이 도대체 어떤 문인지 오늘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 주님의 문 ― 선택된 사람만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가, 시편 118편 20절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의인들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복음서 7:13-14). 마태복음서에는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는데, 찾는 사람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허락 받은 사람도 적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절,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 도합 850명의 예언자가 넓은 문으로 들어갔지만, 좁은 문으로, 구원의 문 쪽으로 선 사람은 오로지 엘리야 한 사람이었습니다. 좁은 문 경쟁률은 자그마치 850대 1이었습니다.

역시 아합 왕 때의 일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이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합동작전을 짜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북이 힘을 모아 시리아를 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남쪽 왕 여호사밧이 제안했습니다.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니, 예언자들에게 물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400명을 모아놓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올라가십시오. 주님께서 그 성을 임금님의 손에 넘겨 주실 것입니다”(열왕기상 22:6).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 미가야는 홀로 반대했습니다. 아합 왕 편에 섰던 예언자 400명은 넓은 문 쪽에 섰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미가야는 좁은 문 쪽에 섰습니다. 이때도 경쟁률은 400대 1이나 됐습니다.

■ 주님의 문 ― 가진 것을 다 버려야 들어가는 문입니다.

주님의 문으로는 의인들이 들어간다고 했지요? 성경에서 ‘의인’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누굽니까? ‘동방의 의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욥 아닙니까? 물론 욥은 자의(自意)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좁고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끔찍하게도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욥은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버려야 했습니다.

가진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자식들도 열 명이나 되던 것, 한 명도 안 남기도 모조리 잃어버렸습니다. 친구들까지 욥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마누라는 정 떨어진 지가 옛날입니다. 동네 강아지들까지도 욥을 조롱합니다. 신용이고 인격이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건강하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욥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보겠다는 일념, 그것 단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이거, 좀 쓸 만한 인간이다 싶으면 반드시 좁은 문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스스로 그리로 들어가지 않으면 억지로 모가지를 끌어다가 좁은 문으로 통과시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십니다. 신약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붙잡혀서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즘 미국 시민권보다 훨씬 파워 있는 신분증입니다. 거기다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이지요. 지금은 그게 불법인 경우가 있습니다만, 당시 이중국적, 그것도 유대인-로마인 이중국적이라면 거의 벼슬과 같은 신분입니다. 거기다가 가말리엘 문하생이에요. 세계적인 일류대학 출신입니다.

집안 좋아, 학벌 좋아, 로마 시민권 있어…, 도무지 부러울 것이 없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래서 젊어서부터 관직에 올라 승승장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도 야속하시지, 그런 바울을 찍으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걸려든 것이지요. 그래서 좁은 문을 통과시키셨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바울은 로마 시민권도 버렸습니다. 가문과 배경도 버렸습니다. 대학 졸업장도 버렸습니다. 바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예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불러내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런 혹독한 ‘좁은 문 통과 의식’을 거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진 것 다 내려놓게 했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욥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철저하게 고난의 문을 통과시키셨습니다.

■ 주님의 문 ― 구원을 위한 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람들을, 그것도 좀 쓸 만하다 싶은 사람들을 못 살게 괴롭히시겠습니까? 왜 그들을 그냥 잘 먹고 잘 살게 내버려두지 않고, 싫다고, 싫다고 하는 것을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붙잡아다가 그렇게 혹독하게 좁은 문으로 통과시키시겠습니까? 그런 게 하나님의 취미생활이겠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쓸 만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일을 맡기시는 겁니다. ▶요셉이 좀 쓸 만하다 싶으니까, 요셉을 그 생고생을 다 시키신 겁니다. 부모형제 다 잃었지요. 보디발의 집에서 좀 먹고 살 만하다 싶으니까 감방에 처넣어버렸지요. 그렇게 험하고 험한 좁은 문을 통과시키신 다음에 이집트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낸 것 아닙니까? ▶모세도 그렇습니다. 왕궁에서 잘 살고 있는 모세를 불러서 광야에서 40년이나 푹푹 썩게 만드신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냈지요. ▶엘리야는 또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무너지고, 오로지 경제발전과 육체의 쾌락만 추구하는 바알종교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 엘리야를 불러서 바알 예언자들과 아세라 예언자들을 쓸어버리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려서부터 신동이었지 않습니까? 박사들하고 맞장을 떠도 꿇리지 않을 뱃심도 있었습니다. 온갖 기적을 일으키실 만큼 내공도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잘 하면 이스라엘 임금도 될 수 있는 대중적 인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좁은 문으로 통과시키셨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말이 십자가지, 그거 아무나 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아무나 거기 매달려서 죽을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재물이나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쏟아놓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왜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쓸 만한 사람을 불러내서 가혹하리만치 좁은 문으로 통과시키시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 맺는 말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예레미야서 5:31-32).

예레미야서의 말씀대로 지금 이 나라에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하천을 파재껴서 강바닥에다가 시멘트를 쳐 바르겠다고 합니다. 얼마 전 코오롱 김천 공장에서 페놀이 흘러나와서 기겁을 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나마 지금은 강물이 흐르니까 시간이 지나서 대충 해결이 됐지만, 강바닥과 강둑에 시멘트를 쳐 바른 상태에서, 물의 흐름까지 막아놓은 상태라면, 우리 구미시내 수돗물 공급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최소한 5박 6일은 수돗물 없이 살아야 했을 겁니다.

우리보다 수백 년 먼저 운하를 파서 운영했던 유럽 여러 나라들이 지금 운하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운하 파는 것이 무슨 도깨비방망이라도 되는 양 거기에 미쳐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거짓 예언자들은 운하를 파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교회의 목사들까지도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운하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백성들도 운하를 하면 경제가 좋아진다니까 덩달아 춤을 추고 있습니다. 문경이고 구미고 지금 운하에 들떠서 난리도 아닙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이런 상황에서 너희는 어느 쪽에 서겠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넓은 문 쪽에 설래, 좁은 문 쪽에 설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좁은 문, 곧 주님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의 열조들은 두 손, 두 발 다 털고 좁은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은 구원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신 문이고, 우리 보고 따라 들어오라고 하시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뒤를 따라, 비록 좁지만 행복한 문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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