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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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시편 118:15-20 
설교일 2008-03-23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부활절 


■ 성서 본문

의인의 장막에서 환호하는 소리,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시편 118:15-20〉


■ 들어가는 말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강건하게 해주시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잘 되게 해주시고, 여러분의 몸까지 건강하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18편에서 시인이 다짐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17). ‘살아 있다’는 것은 참 신나는 일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베트남의 유명한 승려인 틱낫한 스님은, 매일 명상실에서 이런 문구를 붓으로 쓴다고 합니다. “숨 쉬어라, 너는 살아 있다!” 단지 숨 쉬고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 틱낫한(서보경 역), 《이른아침 나를 기억하라》(지혜의 나무, 2003), 27쪽. 앨런 긴스버그라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직 송장이 되지 않은 것으로 나는 행복하다!” ― 나왕 겔렉 린포체(정승석 역), 《행복한 삶 행복한 죽음》(도서출판 초당, 2004), 232쪽.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대단히 축복된 일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죽지 않고, 지금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복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인가, 그 말이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사람인가, 그런 말이기도 하지요.

■ 첫째, 하나님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모세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만, 사람들이 보니까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왜 빛이 났는가,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늘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가장 알기 쉬운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금방 표시가 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꾸 뭘 달라고 떼만 쓰는 사람들은 빛이 덜 납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얼굴빛이 확연히 다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경 읽기입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건 자기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보면 표시가 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 이야기인데, 이분이 지난 연말에 절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저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처음부터 매주일 나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두 주에 한 번은 꼭 나가겠습니다.”

제가 먼저 교회 나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엊그제 목요일 저녁에 이분을 만났습니다. 어디를 같이 갈 일이 있어서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그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올 초부터 지금까지 집안에 큰 사건이 두 번이나 터졌답니다. 다행스럽게도 직접적으로 가족이 다치거나 경제적인 손실을 크게 입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면전에다 대놓고 그랬지요. “그것 참 안 된 일입니다. 속히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저하고 약속한 걸 지키셨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저하고 약속한 것은 저와의 약속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인데, 약속을 안 지키니까 하나님께서 경고를 주시느라고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하나 더 준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마음도 그런 겁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 같으면, 뭘 하든지, 어떻게 살든지 그냥 내버려두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절대로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참된 사람, 참된 일꾼을 만들고야 마십니다. 이것은 ‘무언의 대화’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분이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대화가 이어진다면 머지않아 큰 생명으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둘째, 사람을 존중하며 사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일일드라마를 요전에 잠깐 보니까 이런 장면이 나옵디다. 중년 아주머니 두 사람이 친구 사이인 것 같은데, 한 친구는 차관 부인이고, 다른 친구는 얼마 전에 재혼을 해서 편치 않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취 댁의 아들과 차관 부인의 딸이 서로 사귄다는 것을 알고 차관 부인이 말합니다. “감히 네 아들이 내 딸을 넘봐?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 KBS1, ≪미우나 고우나≫ 이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생각은, 네 아들하고 내 딸은 종자가 다른데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느냐, 그거겠지요.

옛날, 시리아에 나아만이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나병(한센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거 고치지 않으면 관직이고 뭐고 없습니다. 보통사람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당시로서는 거의 인생 종 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입니다. 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사방 수소문을 했겠지요. 그러다가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용한 예언자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일국의 장군답게, 거창하게 군마와 병거를 갖추어서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문 앞에 서서 안으로 통지를 보내니까, 웬 꺼주하게 생긴 사환이 하나 나오더니 말합니다.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아만이 열이 바짝 올랐습니다.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열왕기하 5:11). ‘제까짓 게 어딜 감히…’ 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지요.

엘리사는 내공이 보통이 아닌 예언자입니다. 저 사람의 병의 원인이 뭔가, 생각했겠지요. 엘리사가 판단하기에 나아만은 ‘교만’이 병의 원인이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데, 보통의 권력자나 부자들이 그렇듯이, 나아만도 자기는 ‘종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자기는 엘리사 따위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귀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것은, 요단강 물을 몸에 찍어 바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곱 번 씻으라고 했지요? 그것은 요단강 물에 머리끝까지 집어넣어서 푹 잠겼다가 올라오기를 일곱 번 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조차도 요단강에 푹 잠겼다가 올라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얘기는 인간이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인 수평선 아래로 몸은 물론 머리까지 처박았다가 올라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의 처방은 낮아져라, 겸손해져라, 하는 명령이지요.

처음에는 뿔이 잔뜩 났던 나아만이지만, 부하들이 설득을 해서 겨우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몸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피부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버르장머리를 고치니까 병이 나은 겁니다. 나아만이 다시 살아났지요? 사람을 내리깔아 보고 우습게 여길 때는 인생 막장까지 내려가게 되었지만, 그가 겸손해져서 사람을 존중하게 되니까 다시 살아났습니다.

■ 셋째, 자연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자연’ 말을 하면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 뭐 먹고 사는 데 별로 연관도 없는 건데, 적당히 대하면 되지!’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우습게 여기고,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고, 자연을 마구 대하면 결코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제대로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욥이란 사람이 정말 처절하게 고난을 당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이라고 인정하셨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쫄딱 망했습니다. 억울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빠득빠득 따집니다. ‘아니,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발 말 좀 해주세요. 그렇게 침묵만 하고 계시지 말고, 그렇게 숨어 계시지만 말고 당당하게 나와서 저하고 토론이라도 한번 해봅시다.’

사실 욥은 하나님과 잘 통하는 사이였습니다. 열심히 예배도 잘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욥기 1:5). 뿐만 아니라, 다른 부자들처럼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과부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욥기 29:13).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욥기 29:15-16). 그는 고난 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습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하였습니다(욥기 30:25).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모진 고통을 주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제발 자기가 고통을 받는 이유나 좀 알자고, 아니,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좀 만나나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며 매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염없이 침묵하셨습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기진맥진해서 거의 시체가 다 되어갈 무렵에야 드디어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렇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읽으면서 끝 부분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답을 안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고도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시는 장면이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나오는데, 38, 39, 40, 41, 이 네 장에 걸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네가 자연보다 나은 게 있느냐?’ ‘네가 왜 자연을 우습게 아느냐?’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이 긴긴 말씀은, 놀랍게도 자연에 대한 주제, 단 한 가지였습니다.

정말 그럴까, 궁금하신 분들은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를 꼭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땅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아느냐? 너는 바닷물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아느냐? 너는 해와 달이 어떻게 운행하는지, 빛이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아느냐? 너는 비와 눈이 어떻게 해서 내리는지 아느냐? 너는 별들이 운행하는 법칙을 아느냐? 동물들이 어떻게 새끼를 낳고 살아가는지 아느냐? 너는 타조와 말과 독수리 등 온갖 날래고 힘센 동물들이 어떻게 그렇게 위용을 떨치는지 아느냐?’

욥은 그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욥기 42:2-3).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 42:6).

욥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비록 비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존중하며 산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생각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의 완벽함을 방해하는 에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진정한 의인으로 만들려고, 정말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그렇게 크나큰 고통을 주신 것이었는데, 욥은 그 과정을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전에 누리던 것들이 모두 부활되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니까 비로소 욥이 살아난 것입니다.

■ 맺는 말씀

완전한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은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복음서 5:48). 완전한 사람이란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자연 앞에서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사람입니다.

이제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함으로써, 사람을 차별 없이 존중함으로써, 자연 앞에서 겸손해짐으로써, 영원히 사는 ‘의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1102 내 인생 광내기
1101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1099 벌거벗은 이사야
1098 사무엘처럼
1097 안디옥 공동체
1096 주님의 문
1095 아기야, 칼이 되어라!
1094 성령의 언어
1093 왜 어린이를 복되다 하는가?
1092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1091 우상에 대하여
1090 내가 이 일을 지체 없이 이루겠다!
1089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를!
1088 희망 전도사
1087 그리스도의 사람
1086 어둠의 자식, 빛의 자녀
1085 온 생명을 충만케 해주십시오!
1084 믿음의 어머니들
1083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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