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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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누가복음서 17:20-21 
설교일 2008-06-22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기념주일 


■ 성서 본문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누가복음서 17:20-21〉


■ 들어가는 말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할 때,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지요.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누가복음서 17:20-21).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지리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우리가 사는 이 땅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되는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주님께서 오셔서 만들어주시는 나라,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첫째, 사람과 하나님이 ‘샬롬’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둘째, 사람과 사람이 ‘샬롬’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셋째, 사람과 자연이 ‘샬롬’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잘 통하고, 이웃과 잘 통하고 자연과 잘 통하면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가운데서 오늘은 사람과 사람이 ‘샬롬’을 이루는 일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잘 통하려면 가장 먼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이해’와 ‘관용’으로 다져져야 합니다.

■ 관심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출발은 ‘관심’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어떤 옷차림을 하고 사는가, 그 사람은 어떤 머리 스타일을 주로 하고 다니는가, 그 사람은 어떤 음식을 잘 먹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런 사소한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라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서로 관심 없이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누가복음서 7:32).

옆에서 폭력이 일어나도 상관하지 않고, 이웃나라에서 지진이 일어나도 관심이 없고, 동족이 기근으로 굶어 죽어도 남의 일처럼 여긴다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날이 갈수록 사회가 각박해진다고 하지요? 그것은 날이 갈수록 자기만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강해져서 남 생각은 잘 안 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친척 가운데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집 아이들을 데려다가 대신 키워주었습니다. 이웃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지 안 나는지 늘 살피며 살았습니다. 옆집에서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이웃의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동네, 그런 동네는 참 평화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주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사랑’ 하면 우리는 먼저 남녀 사이의 사랑을 생각하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손끝만 스쳐도 전기가 찌릿찌릿 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미소만 한 번 지어줘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서 따뜻한 문자메시지 하나만 와도 최소한 일 주일 동안은 행복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여기서 그친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랑의 범위를 좀 더 넓혀야 합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이야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지요.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미물까지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에로틱한 사랑에 더하여, 가족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남달라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한 가족이 서로 사랑한다면 그 가족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한 마을을 이루고 산다면 그 마을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이 한반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면 이 지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사랑을 확대해 나갈 때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되어 나갑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이웃에게, 이웃 나라에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책만 던져 준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곳곳에 교회만 세운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는 않습니다. 복음과 함께 사랑을 확장시켜나가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커지게 됩니다.

■ 이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관심은 사랑으로 꽃이 핍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멋진 일이지요.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청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다 행복하다면 왜 만남 100일째 되는 날을 축하하고 1년째 되는 날을 축하합니까? 그 전에 깨지는 수가 많기 때문이지요. 서로 사랑해서 결혼까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갈라서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사랑이 능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불완전한 사랑을 그냥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린도전서 13:7).

유명한 칭기즈칸 이야기입니다. 그는 열여덟 살 때 결혼을 했습니다. 상대는 어렸을 때 정혼한 동갑내기 소꿉친구인 볼테였습니다. 그때의 허점을 틈타 메르킷 부족의 기마병 300명이 칭기즈칸의 주둔지를 기습했습니다. 그때 그의 가족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아내 볼테도 포로로 잡혀 메르킷 부족의 작은 족장인 칠게르 부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난 칭기즈칸은 주변 부족들과 연합해서 메르킷 부족을 공격해서 대승을 거두고 아내 볼테를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볼테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얼마 후 원수의 피가 섞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때 징기스칸은 아내와 아이를 죽일 생각도 했었지만 그의 어머니 호에륜은 충고했습니다. “아내와 적군도 포용할 줄 모르면서 어찌 세상을 얻겠느냐? 세상을 얻으려면 세상을 덮을 포용력을 갖춰라.”

깊이 생각해보니 포로가 되어 정조를 잃은 아내의 잘못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이름을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주치를 다른 아들과 차별 없이 똑같이 대했고 아내도 변함없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칭기즈칸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적은 내 안에 있다. 나를 극복함으로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이해’와 관용이 없는 사랑은 ‘집착’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반드시 ‘이해’와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확장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됩니다.

■ 맺는 말씀

지금부터 58년 전, 1950년 6월 25일에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한 민족이면서도, 아직까지도 서로 갈라져서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태가 아닙니다. 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이던 것이 둘로 갈라지면 그것은 ‘한’이 됩니다. 한이 오래 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는 매년 6월 25일을 앞둔 주일을 ‘민족 화해주일’로 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 일부에서 ‘상호주의’를 말합니다. 주는 만큼 받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관심은 사랑으로 꽃이 핍니다. 그 꽃은 ‘이해’와 ‘관용’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에, 우리 가족 가운데에, 우리 이웃들 가운데에, 우리 민족 가운데에, 지구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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