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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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누가복음서 19:1-10 
설교일 2012-06-10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누가복음서 19:1-10>


■ 들어가는 이야기

오늘,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을 맞이하는 여러분 위에 능력의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여러분을 평화의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제 6월 하고도 중순이 되었습니다. 따뜻함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던 봄은 갔고, 더위 때문에 부담을 느껴야 하는 여름이 되었습니다. 곧 장마도 시작되겠지요. 이때쯤 되면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공연한 일에 짜증이 나는 일도 많아집니다. 그냥 기분대로 행동하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홍길동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이지요.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사람이 허균(許筠, 1569-1618)인데, 이분을 단순히 소설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 양반은 아주 훌륭한 학자요 사상가요 혁명가입니다. 그리고 대단히 꼼꼼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광해군 시절인 1613년경에 이분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는 문집을 직접 편찬했는데, 상당히 방대한 책입니다. ‘성소’(惺所)는 허균의 호입니다. 그리고 ‘부부고’(覆瓿藁)는 단지를 뒤집어서 말린다는 뜻인데,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허균은 나이 쉰이던 1618년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는데, 역적의 책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처형당하기 전에 자기 책들을 사위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들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여간 세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책 제 11권에 보면 「호민론」(豪民論)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백성을 세 가지로 분류한 글인데,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짚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는 항민(恒民)에 대해서 말하는데요, 여기서 ‘항’(恒)은 ‘항상 항’ 자입니다. 늘 그렇고 그런 백성이라는 뜻이지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대충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원망할 원’ 자를 써서 원민(怨民)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해결할 방도를 찾기보다는 욕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말하는 것이 ‘호민’(豪民)입니다. 여기서 ‘호’ 자는 ‘호걸 호’ 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문제를 정확히 짚고 있는 사람들로서, 평소에 티를 내지는 않지만 조용히 때를 기다립니다. 때가 됐다 싶으면 세상의 변혁을 주도합니다. 이들이 앞장서면 항민들이나 원민들도 논두렁 밭두렁에서 함께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그런 얘기지요. 누구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홍길동이 그 모델입니다. 홍길동도 그렇고 허균도 그렇고, 참 멋있는 사람이지요.

■ 삭개오 이야기

이제 성경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삭개오는 세관장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그 지방의 세무서장 쯤 되겠지요. 지금이야 공무원들이 법에 따라 일을 하고 월급을 받습니다만, 그 당시 세관장은 자기 재량으로 세금을 주무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히 부자였을 겁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부자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지만 부자라고 다 행복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삭개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키가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옷이야 사 입으면 되지만 키는 돈으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게 삭개오에게는 콤플렉스였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면 모르겠는데, 세관장이라는 직책이 남의 돈을 거두는 자리잖아요. 그냥 조금씩 거두었겠습니까? 아니지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삭개오만 보면 ‘저놈, 내 돈 빼앗아 간 놈! 도둑놈! 나쁜 놈!’ 하면서 속으로 욕을 했겠지요.

아무리 부자라도 이렇게 욕을 먹으면서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입니다. 사람이 대개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기뻐지고 삶의 보람을 얻게 되는데, 삭개오의 삶은 욕을 얻어먹는 게 일상이었으니 얼마나 피폐했겠습니까? 때로는 칭찬도 듣기는 했겠지요. 집이 좋다, 옷이 좋다, 요즘 같으면 자동차가 좋다… 등등의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성 제로에, 매너는 빵점에, 개념은 안드로메다에 가고 없고, 욕심만 가득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판국에 그런 칭찬은 헛물켜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되는 대로 사는 항민도 아니었고, 남에게 욕하고 불평만 하는 원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호민이었습니다. 물론 삭개오가 홍길동처럼 사회의 공의를 위해 떨쳐 일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변혁시켜보려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호민이었습니다. 때가 왔을 때 그는 평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예수님의 눈길을 끄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시간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는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공익재단 같은 것을 만들었을 수 있겠지요. 가까운 친인척을 재단이사 자리에 앉혀서, 실제로는 사위에게 환원하면서 무늬로만 사회에 환원하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단을 깔끔하게 독립시켜 명실상부하게 사회 환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억지로 빼앗은 것들을 체크했습니다. 세무를 보는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적어두었겠지요. 그 사람들에게는 빼앗은 금액의 네 배를 물어주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재산의 반을 내놓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알량하게 남은 자존심과 체면까지 모두 던져버리는 일이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누가복음서 19:9).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구차한 삶을 꾸려가던 자신을 변화시켜서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것, 이것을 예수님은 ‘구원’(救援)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구원이 아닙니다. 엊그제 공지영(@congjee) 작가가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 어떤 노력도 부질없을 때, 세상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눈물이 터지기 직전, 아마도 그때가 신이 나를 부르는 시간이리라.” 아마도 삭개오의 심정이 바로 이랬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때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올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일이 되지 않을 때, 도무지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때, 그런 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골방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 맺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그것을 우리는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뭔가 시키실 일이 있을 때도 우리를 부르시지만, 위로가 필요할 때, 치료가 필요할 때, 구원이 필요할 때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언제나 생각 없이 사는 항민이나, 대책 없이 불평만 하는 원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나 깨어 있어서 때를 분별할 줄도 알고, 나서야 할 때 행동할 줄도 아는 호민만이 하나님의 부르실 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수면제 사러 약국으로 달려가거나 천장에 끈을 매달면 큰일 납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여러분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주변에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웃이 있다면 여러분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23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들
922 주님의 나라로!
921 주님의 나라, 기쁨의 나라
920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919 주님께서 주신 은총
918 주님께서 일어나셨다!
917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 (3)열정의 사람
916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 (2)기도의 사람
915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 (1)진지한 사람
914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
»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시간
912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휴식
911 주님께로 몸을 피하자
910 주님께 꾸어 드리기
909 주님과 함께 다닐 사람
908 주님 음성 나 들을 때
907 주님 계신 그 곳에
906 주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905 죄에서 자유를!
904 죄 짓지 않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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