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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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호세아서 6:1-6 
설교일 2012-11-11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서 6:1-6>


■ 들어가는 이야기

엊그제 대학 입시를 위한 수학능력시험이 끝났습니다. 예년보다 쉬웠네, 어려웠네, 말도 많고, 희비가 엇갈리는 수험생들도 여럿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세 사람이 시험을 쳤는데, 모두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고 애쓴 수험생들과 부모님들과, 그리고 오늘도 이 자리에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위에 하늘의 평화와 땅의 축복이 넘치도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은 호세아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 하나님을 알자!

오늘의 본문말씀을 호세아서 6:1-6으로 정하고 조금 전에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만, 이 말씀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마태복음서 12:7). 이것을 흔히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제사보다는 순종이 낫다!” 호세아가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물론 호세아가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일러주신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도대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하였기에 이런 폭탄 발언이 나왔겠습니까? 호세아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아모스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요,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모스서 5:21-23입니다. f1“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사를 드리고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고, 죄를 지었을 때도 제사를 드리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하나는 철저하게 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시니까, 이것들이 제사는 열심히 드리는데,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것은 엉망진창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과 외국인을 내팽개쳐놓고 자기들 배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몫을 빼앗아서 부자들만 호의호식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극화가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사장들과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우리는 제사를 열심히 드렸으니 이걸로 다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제사 그렇게 열심히 드려봐야 소용없어,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해, 이겁니다. 하나님을 알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약자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가난한 사람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이다, 그것부터 먼저 알아라, 이 말입니다.

■ 고르반!

어느 나라나 지배층 사람들이 탐욕이 많지만, 이스라엘의 양반층 사람들도 얌체 같은 짓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아모스나 호세아 시대에도 그랬고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마가복음서 7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계명에서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부모 공경하는 것도 잘 안 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일수록 무섭게 돈을 아끼지 않습니까?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돈이 들어가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꼼수를 부리는가 하면, 이렇게 합니다. 부모님께 가서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뭘 좀 사드려야 하는데, 제가 그 돈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느라고 돈이 없으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마가복음서 7:10-12).

하나님께 헌금을 바쳤는데, 부모님들에게 뭘 따로 드리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도 똑 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하나님께 드렸으면 된 것 아닌가, 이런 논리지요. 완전히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하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23:23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세상과 이웃들에 대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세상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안 된다, 그러면 위선자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훈련과 실전

요즘도 이런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니까, 나는 헌금도 누구보다 많이 하니까, 내 할 일은 이것으로 다 됐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사회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도 하고, 기부금도 남들 못지않게 내고, 그 누구보다도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데, 교회는 뭐 하러 나가? 나는 이걸로 충분해,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개념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곧 교회생활을 한 낱말로 ‘예배’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세상에 대한 의무를 뭉뚱그려서 ‘봉사’라고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단순화시켜놓고 보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예배가 먼저인가, 봉사가 먼저인가?’ ‘예배가 더 중요한가, 봉사가 더 중요한가?’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와 봉사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수레의 양 바퀴입니다. 하나만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배는 훈련이고 봉사는 실전이다!’ 훈련 없는 실전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예배 없는 봉사는 위험합니다. 그리고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훈련만 하고 앉아 있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있던 박지성 선수가 팀을 옮겼는데, 요즘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박지성 선수가 맨유 선수들 가운데 가장 탐난다고 했던 선수가 폴스콜스입니다. 가능하다면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로 뽑아오고 싶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춘 선수지요. 이 친구가 축구를 얼마나 잘하는지, 운동장에서 훈련 도중에 장난삼아 발로 공을 차서 화장실 가는 동료의 뒤통수를 정확히 맞힐 정도라고 합니다. 부러운 실력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훈련 중에만 그렇게 하고 실전에서 세트피스 상황이 왔을 때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는 골문 구석으로 공을 차 넣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고 실전에서 그렇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라면, 그게 훈련 없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 맺는 이야기

이와 같이, 예배는 봉사를 위한 훈련이고, 봉사는 예배를 통하여 잘 훈련된 사람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로 대표되는 교회생활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봉사’라는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때는 생명력이 길지 못합니다. 한때 봉사를 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손을 놓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초훈련이 제대로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한때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활동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변절해버리는 일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상적 기초가 잘 안 다져져서 그런 것이지요. 아무튼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이 두 가지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운동만 해서도 안 됩니다. 함께, 동시에 해야 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충실히 감당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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