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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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12-12-30 15: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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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히브리서 4:12-13 
설교일 2012-12-30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 들어가는 이야기

주말마다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이 많이 미끄러운데, 교회 오시면서 불편하시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2012년의 마지막 주일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뵙게 돼서 기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한없는 은총이 충만하게 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 칼잡이

한 5년쯤 전에 말씀드렸던 이야기입니다만, 오늘의 주제가 칼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끄집어내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실력 있는 칼잡이들이 모여서 시합을 벌였습니다. 예선을 거쳐 최종결선에 세 명이 올라왔습니다. 이번 과제는 날아가는 파리를 칼로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파리를 한 마리 날렸습니다. 첫 번째 무사가 칼을 휘둘렀습니다. 놀랍게도 파리는 두 동강이 나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 또 한 마리의 파리를 날렸습니다. 두 번째 무사는 재빠르게 칼을 수직과 수평으로 휘둘렀고, 놀랍게도 파리는 네 토막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세 번째 무사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칼을 휘둘렀는데…, 파리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심판이 말했습니다. “자넨 놓쳤군!” 그러자 세 번째 무사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 파리는 다시는 알을 까지 못할 겁니다!”

정말 대단한 실력 아닙니까? 우리도 그런 실력을 가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난 6월(2012.6.10 주일)에 저는, 백성 곧 국민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첫째는 항민(恒民)입니다. 여기서 ‘항’(恒)은 ‘항상 항’ 자입니다. 늘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든, 대충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원망할 원’ 자를 쓴 원민(怨民)입니다. 이 사람들은 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해결할 방도를 찾기보다는 욕부터 먼저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가 ‘호민’(豪民)인데, 여기서 ‘호’ 자는 ‘호걸 호’ 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문제를 정확히 짚고 있는 사람들로서, 평소에 티를 내지는 않지만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지금이 그때다 싶으면 세상의 변혁을 주도합니다.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호민’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석을 잘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칼이 필요한 것입니다.

■ 정보 분석

제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참 좋은 교수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한분이 이상섭 교수라는 분입니다. 10년쯤 전에 은퇴를 하셨지만 지금도 명예교수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분이 문학 비평가이신데 원래 영문학을 전공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영어를 배웠지요.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이분이 쓴 글을 공부했던 적이 있던 터라, 그런 분을 직접 보면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어쨌든 이분이 강의시간에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무엇을 보고 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답들이 나왔습니다. TV를 보고 안다는 사람, 신문을 보고 안다는 사람, 잡지나 책을 보고 안다는 사람… 등등. 교수님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렇게 얻는 정보가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박정희가 통치하던 유신시대였는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던 때 아닙니까? 방송이든 신문이든 박정희 욕하면 잡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이 무서워서 개인적인 자라에서도 정부를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그런 상황판단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국제 언론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각국의 언론자유지수를 발표하는데요, 노무현 정권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30위권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그게 69위까지 떨어졌다가 최근에 ‘조금’ 올랐지요. 기자들이나 언론인들이 잡혀가는 일은 줄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나라의 언론자유 상황은 상당히 열악합니다. 예전처럼 대놓고 잡아가지는 않지만 KBS나 MBC 같은 공영방송 사장 임명권을 정부가 가지고 있어서 이른바 ‘충성 맨’들을 사장으로 심어놓았지요, 정부를 비판하는 기자나 언론인들에게는 보직을 안 주거나 한직으로 밀어내는 등, 상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총칼로 언론을 장악했다면 지금은 밥줄로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방송에서는 전혀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TV를 보면, 외국에서 살인사건 난 것은 크게 보도하면서도, 대통령선거 이후 시국을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되는데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닫고 있습니다. 방송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바보 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 판단의 기준

코카콜라 직원들은 자기들이 만든 콜라를 먹지 않는다고 하지요. 거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의사들도 주사를 잘 안 맞으려고 합니다. 요즘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무척 인기가 높지요. 이 작품을 쓴 유명한 빅토르 위고는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젖소는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소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기자들은 신문에 난 것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문기사라는 게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요지인데요, 결론은 이겁니다. 세상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리한 칼을 가지고 분석을 하고 불필요하거나 해로운 것들은 잘라내고, 꼭 필요한 것들만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잘 드는 칼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 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히브리서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그 칼을 가지면 사람들이 또는 매스컴이 어떤 꼼수를 가지고 말을 하는지,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공항 같은 데 가보면 검색대가 있지 않습니까? 주머니에 권총이나 위험한 금속류를 숨기고 있어도 거기를 통과하면 다 잡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요망한 것도 말씀 앞에 놓으면, 그게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 맺는 이야기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열쇠 말(키워드)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입니다. 어떤 정보나 뉴스를 우리가 접한다고 할 때 그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또는 유용한 것이냐, 해악을 끼치는 것이냐, 분간하려면 ‘생명’이라는 키워드를 들이대서 검증해보면 됨니다. 그러면 그 일이 생명을 살리자는 일인지, 생명을 파괴하자는 것인지 금방 판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나는 너희에게 칼을 주려고 왔다!” 예수님의 말씀은 칼로 사람들을 베어서 생명을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칼로 사리를 예리하게 판단하여서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분명하게 가려내라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훌륭한 칼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 칼을 가지고 세상사를 명확하게 분간하게 되기를 바라고, 그럼으로써 저와 여러분이 헛된 길로 가지 않고 주님의 나라를 향해 기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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