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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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8-10-12 21: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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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마태복음서 18:21-22 
설교일 2008-10-12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서 18:21-22〉


■ 들어가는 말씀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참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한 인기 여배우의 자살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싸이게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여러 사람들이 원인분석과 처방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저는 자살의 원인을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일면, 극단적인 경우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차마 남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 ‘자살’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살아 있을 때 직접 대화를 해보지 않아서 그냥 추측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최진실 씨의 마음에도 분노가 가득 차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혼한 남편에 대한 분노, 까닭 없이 악성 댓글을 써대는 일부 네티즌들에 대한 분노, 자기 심정을 잘 이해해주지 않는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런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서, 그것을 제대로 삭이지 못해서 결국 아까운 목숨을 해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서 분노를 없애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용서’입니다. 용서하면 분노가 없어지는데,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마태복음서 18:22). 완전히,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완전하다는 것.

성경에는 이른바 ‘절대 언어’ 또는 ‘절대 표현’들이 종종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지요.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복음서 5:48). 무슨 일이든지 하는 둥 마는 둥 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에 보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한두 가지 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 절에 보면,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얼마간 참고 견디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5장 20절에 보면,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모든 일에’ ‘언제나’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도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할 때도, 대충 한두 번 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고 ‘완전히’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잘 아시다시피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한 수’이지요. 그것에다가 또 완전한 숫자인 열을 곱하고, 거기다가 일곱을 한 번 더 곱하여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니까, 예수님은 완전에 완전을 거듭하여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어느 할머니 이야기.

어느 날 마더 테레사가 길을 지나는데 쓰레기더미에 눈길이 자꾸 갔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거기에 한 할머니가 추위에 떨며 누워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주위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어슬렁거리는 개들을 쫓아버리고 할머니를 안아 들었습니다.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웠습니다. 즉시 그를 자기의 거처로 데려가 보살펴주었지만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게 된 상황이라, 죽음이라도 행복하게 맞이하도록 해주자, 생각하고 그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테레사는 이 할머니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에게만 의지하며 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아들이 어머니를 쓰레기더미에 내던져버린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로서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배신감이 불덩이 같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할머니는 끊임없이 아들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할머니를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그분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순간순간 얼마나 많이 배신합니까? 하지만 그분은 그럴 때마다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은총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사랑해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사랑해주십니다. 당신이 여기에 온 것도 그분의 커다란 사랑 덕분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 당신도 당신에게 죄를 짓거나 잘못한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야 합니다. 특히 아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아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풍성하게 강복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주하기보다는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거듭 용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던 할머니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참회의 눈물이 뺨 위로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마더 테레사의 품에 안겨서 아들의 잔혹한 행위를 마음속 깊이 용서했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에 실낱같은 평화가 번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마더 테레사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그 아름다운 진주는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완전한 평화 속으로 잠겨들어 갔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간 것입니다. ― T. T. 문다켈(황애경 역), ≪소박한 기적≫(위즈덤하우스, 2005), 84-86쪽.

■ 용서의 기쁨.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믿어 복을 받자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자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용서’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한때 분노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죄를 지으니까, ‘저것들, 완전히 쓸어버리겠다!’ 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큰 홍수를 내리셨지요. 그렇게 하고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서하기로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성경 본문이 그 내용이지요.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다짐하셨습니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18:21-22). 사람은 날 때부터 그 생각이 악하기 마련인데, 그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용서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뭔가 별나게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서입니다. 이사야서 43장 25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용서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심정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이사야서 48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내가 분노를 참고, 내 영예 때문에 내가 자제하여, 너를 파멸하지 않겠다”라고 하셨고, 11절에서는, “나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겠느냐? 내 영광이 남에게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사람끼리 누구를 용서 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용서’란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 정찬주, ≪자기를 속이지 말라≫(열림원, 2005), 227쪽.

나에게 해를 끼치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사람을 내가 존경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존경까지는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합니다. 분노를 가슴에 품고 살면, 그 분노가 상대방에게 가기 전에 내가 먼저 죽습니다. 바비 샌더즈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분노를 고집하고 복수를 꿈꾸는 것은 당신 자신이 쥐약을 먹고 쥐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다. 분노는 분노의 대상이 아닌 당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며 당신의 매력과 건강과 행복을 조금씩 갉아먹고 몸은 물론 영혼까지도 죽일 수 있다.” ― 바비 샌더즈(윤상운 역), ≪돌고래에게 배운다≫(넥서스BOOKS, 2004), 224쪽.

집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불을 냈나, 화재의 원인이 뭔가, 그런 것은 나중에 알아봐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불부터 꺼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생기는 분노는 마음의 불입니다. 얼른 끄고 봐야 합니다. ― 틱낫한(서보경 역), ≪이른아침 나를 기억하라≫(지혜의 나무, 2003), 100쪽 참고. 그것이 용서입니다. 분노를 완전하게 없애면, 그것이 완전한 용서입니다.

■ 맺는 말씀

여러분 가슴속에 혹시 조그마한 분노라도 있다면 지금 즉시 꺼버리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뭐라고 하든,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끄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끄시기 바랍니다.
923 예수님처럼
» 완전한 용서
921 지켜보시는 하나님
920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919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918 몸으로 담 허물기
917 예수님의 동지가 되십시오!
916 예수님과 사귀십시오!
915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914 좋은 직업 찾기
913 희망 있는 사람이란?
912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휴식
911 어버이 바울
910 척척 이루어지는 계획 세우기
909 세 가지 복
908 혁명
907 이제 다시 시작이다!
906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905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904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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