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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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13-10-13 15: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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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여호수아기 24:21-24 
설교일 2013-10-13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오디오파일 듣기/내려받기]

■ 성서 본문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주님을 택하고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한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당신들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버리고, 마음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기 24:21-24>


■ 들어가는 이야기

어느덧 10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머지않아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게 되겠지요. 이런 좋은 계절에 우리는 이번 주말, 전 교인 수련회를 떠납니다. 지난 2008년에 우리가 제14회 수련회를 가진 뒤 올해가 제15회니까 만 5년 만에 다시 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우리 한울교회가 다시 신앙의 기지개를 켬으로써 앞으로 더 행복하고 더 보람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은 법과 도덕과 양심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법은 권력자들이 만든 기준입니다. 도덕은 함께 사는 이웃들이 만든 기준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나 스스로 만든 기준입니다.

■ 도덕

먼저 도덕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인지 2학년인지 다니던 시절, 제 외삼촌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했지만, 그때만 해도 옛날인지라, 큰외삼촌 댁에서 사흘 정도 잔치를 했습니다. 새로 외숙모가 된 새색시는 색동저고리 한복을 차려 입고 안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시댁 식구들과 친척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얼굴도 보여드리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숙모가 낮선 집에 와서 며칠 동안 그러고 있느라고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에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그때는 그게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버글버글한 안방에서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예쁜 새색시가 일어섰습니다. 머리에는 족두리를 쓰고 손이 보이지 않게 양팔을 모으고 일어섰다 앉았다 반복했습니다.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습니다. ‘꼬마인 내가 방에 들어와도 외숙모가 일어설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몇 번인가 망설이다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살며시 밖으로 나와 있다가 손님들이 뜸한 때를 골라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아, 그랬더니 그때도 새댁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랬다가 제 어머니로부터 함부로 들락거리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습니다만, 그게 어린 시절의 잊지 못할 경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이 당시의 ‘예절’이었습니다. 넓은 뜻에서 ‘도덕’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법

이제 ‘법’ 이야기입니다. 도덕은 강제력이 없습니다. 어른이 방에 들어오실 때 젊은 사람이 일어서는 것이 예의고 도덕인데, 그거 안 지킨다고 교도소 가지는 않습니다. 욕은 먹을지 몰라도 벌금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법은 구속력이 있습니다. 안 지키면 물질적, 정신적인 불이익을 당합니다. 사회에서는 이것을 그냥 법이라고 하지만 종교에서는 ‘계율’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원래 불교 용어인데 ‘계율’이란 말은 계(戒)와 율(律)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율’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사회의 법률과 같아서 규제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율에 대비해서 ‘계’는 도덕과 같은 성격을 띱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율’입니다. 어디까지나 타율적입니다. 그러나 ‘산목숨을 죽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이것은 ‘계’입니다. 자율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지요. ― 법정, ≪산방한담≫((주)샘터사, 2010), 254쪽. 자,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십계명은 ‘계’이겠습니까, ‘율’이겠습니까? 우리말 성경에 보면 뭘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서 ‘율’인 것 같지만 히브리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살인을 하지 않으리라’ ‘너희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리라’ 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일부 성서 주석가들은 십계명이 계율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언이라고 주장합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이세욱 임호경 역),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주식회사 열린책들, 2011), 170쪽.

■ 양심

자, 어쨌든 ‘법’이나 ‘율’ ― 이것을 함께 일컬어서 ‘율법’이라고도 하지요 ― 은 남에 의해서 규제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청개구리 과라서 그런지 남이 저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이제 ‘양심’(良心)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여러분, 김근태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한때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만, 지난 2011년 12월 30일에 세상을 떠났지요. 그때 나이가 65세였습니다. 요즘 시절에 일찍 떠난 셈이지요. 독재시절의 고문 후유증 때문일 겁니다. 김근태를 아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끔찍하게도 그를 아낍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김근태 씨는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에서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단 한명도 동지를 팔지 않았습니다. 모든 짐을 자신이 짊어졌습니다. 당시에 억울하게 끌려가서 고문을 받던 사람들 가운데는,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며 고문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강압에 못 이겨 거짓 진술조서에 지장을 찍은 것이지요. 그 결과 또 다른 희생자를 양산케 되는 가슴 아픈 악순환이 이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김근태와 함께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 이야기인데요. 이 사람은 김근태의 진술조서를 보고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의 진술조서에는 동료들의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자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을 하나 적어 넣어야 고문이 끝난다는 것을 아는지라, 그는 김근태의 양심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 전희식,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 먹다≫(도서출판 역사넷, 2003), 216쪽. 이게 ‘양심’의 힘입니다.

■ 맺는 이야기

오늘 여호수아기 본문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다짐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기 24:15). 백성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다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일단 수긍했습니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당신들이 주님을 택하고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한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여호수아기 24:22). 이게 무서운 말입니다. 남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다짐한 것이니 양심껏 잘 지키라는 것이지요.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법도 잘 지켜야겠고, 도덕적인 기준도 존중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1. 20131025 Na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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