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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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사도행전 4:18-20 
설교일 2014-01-12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오디오파일 듣기/내려받기]

■ 성서 본문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18-20>


■ 들어가는 이야기

새해 들어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성령님의 차고 넘치는 에너지가 이 시간에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무엇이 옳은 일인가?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이라는 곳에서 어떤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침 거기를 지나가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한 푼 도와달라는 것이었지요. 베드로가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돈이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걸 못 줘서 참 안타깝군요. 그 대신에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돈이 아니면 다른 것이라도 주려니 하고 그 사람은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뛰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겠지요. 그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 도성에 퍼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처형을 당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사람은 죽을죄를 지어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분은 사실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몰라보고 유대 사람들이 죽여 버린 겁니다. 조금 전에 성전 앞에서 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눈에 가시 같던 예수를 자기들이 죽였는데, 그게 말도 안 되는 사법살인이었다면서 베드로가 떠들고 다니니, 이만저만 곤란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그들의 설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그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사람을 잡아들였습니다. 잡아들이기는 했는데 죄가 없잖아요. 죄도 없는데 이 사람들마저 처벌을 한다면 민심이 더욱 나빠지게 되겠지요. 할 수 없이 그들은 겁이나 줘서 풀어주자 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마라. 안 그러면 다치는 수가 있어!”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이것은 명백한 언론탄압입니다. 권력자들은 서민들이 바른말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던 그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요.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 좀 조용히 시키시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누가복음서 19:40). 백성의 소리 곧 군중의 함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청 광장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데모를 하면 경찰은 언제나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즉시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데모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독재정권은 그렇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쨌든 데모를 막으려고만 합니다. 그렇게 계속 막고 싶겠지만 그런 정권은 결국은 무너집니다. 국민을 이기는 정권은 없기 때문입니다.

■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허성도 교수의 강의록을 봤는데요, 거기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상소제도라는 게 있었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백성들이 왕에게 편지를 써서 할 말을 하는 제도지요. 기생이나 노비나 글만 쓸 수 있으면 임금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비판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찰사에게 이야기하니까 들어주지를 않는다, 그런 경우에도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상소문을 한문으로 썼잖아요.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 나온 게 언문상소입니다. 한글로 써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한글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신문고(申聞鼓)입니다. 이건 조선 태종 때 생긴 것입니다. “그럼 여기 와서 북을 쳐라!” 했던 것이지요. 대궐 앞에 와서 북을 치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지방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겁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 격(擊) 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 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이겁니다. 그러면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상소나 신문고나 격쟁이 결코 형식적인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조 시대를 보면 정조의 재위기간 24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정조가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게 5,000건입니다. 매년 거의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지요.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한 건 이상을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임금 같은 이는,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백성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언로(言路)를 열어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 맺는 이야기

노무현 정부 때 세계에서 30위권이었던 우리나라의 언론자유지수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지나오면서 50위권으로 밀려났습니다.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누구든지 자신의 의사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921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땅
920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919 만족의 손익분기점
918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야 할 것
917 원수 다루기
916 사랑을 위해서라면
915 낮술에 취하다!
914 굶주림입니까? 칼입니까?
913 집안에 감도는 기운
912 꼬드김과 설득
911 “하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910 지혜는 옵션이 아닙니다!
909 큐비클에서 탈출하라!
908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07 알맞은 ‘때’
906 제자 공인인증
905 느헤미야의 기도
904 아름다움에 대하여
903 잠이 보약입니다!
902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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