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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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7-10-07 13: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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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4:2-3 
설교일 2007-10-07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땅의 열매가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때에는,
시온에 남아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곧 예루살렘에 살아 있다고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이사야서 4:2-3〉


■ 들어가는 말씀

지난주에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우리 측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아리랑’을 관람했다고 하지요. 우리 측 일행들이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하는데,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장엄한 공연입니다. 저는 딱 2년 전에 아리랑 공연을 보았는데, 저 역시 일어나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의 호(好) 불호(不好)를 따지기 이전에, 그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리랑 ‘공연’이 아니라, 그 노래의 가사입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사람에게 이별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칼에 살을 베이면 피가 나고 아프지요. 같이 붙어 있어야 할 것이 갈라지면 그와 같이 피가 나고 아프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 조상들은 ‘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헤어지는 것도 아픔이지만, 만일 상대가 나를 배신하고 떠나간다면, 그것은 아픔 가운데서도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이런 아픔을 예수님도 겪었고, 바울도 겪었고, 오늘 우리도 겪고 있습니다.

■ 외로운 예수님

먼저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아픔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셨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광야에서, 배고파하는 사람들을 5천 명이나 배불리 먹이셨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마도 그때 여론조사를 했더라면 예수님에 대한 지지율이 100%가 나왔을 겁니다. 이때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칭송했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요한복음서 6:14).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요한복음서 6:15).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환호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위대한’ 일을 했다면 공치사 듣기를 기뻐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다음날,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고,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배를 타고 몰려다니다가 겨우 예수님을 찾아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서 6:26-27).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 싶었던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먹고 배부를 수 있는 ‘육의 양식’만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갑갑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제 빵을 먹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생명의 빵,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합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보는 눈앞에서 기적을 펑펑 베풀어서, 배도 부르게 해주고, 왕이 되어서 경제도 살려주면 좋겠는데, 아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도 아니고, 엉뚱한 말씀만 계속 하시니, 짜증이 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님처럼 살아라, 이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요구는 등 따시고 배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정의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이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옆에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제자들까지 그랬다는 것입니다. 6장 60절에 보면 제자들이 이렇게 수군거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너무 어렵다는 말이에요. 그냥 먹을 것이나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주면 좋은데, 왜 그런 골 아픈 이야기만 하시느냐, 이런 불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지율이 곤두박질 쳤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제자 열두 명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요한복음서 6:67). 오죽 답답하셨으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까지 하셨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떠나갔는데, 너희는 이제 어쩔래, 그런 말이지요. 다행히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요한복음서 6:68-69).

■ 말년의 바울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 하지요.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먹을 것 줄 때는 좋아하다가, 생명을 이야기하고, 도리를 이야기하자 미련 없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더 이상 얻어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예수님의 고뇌가 있습니다. 이런 고뇌는 예수님만 느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불철주야 애썼던 바울도 이런 고독을 맛보았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말년에는 로마에서 생활을 했는데, 그것도 자유롭게 산 것이 아니라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용건을 말한 다음, 디모데후서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바울이 잘 나갈 때, 바울과 함께 다니며 선교를 했던 사람입니다. 누가, 마가 등과 함께 바울의 측근에 속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늙고, 병들고, 갇힌 신세가 되자, “이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신 임’이 되었습니다. 글쎄요, 이분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바울은 상당히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 한평생 몸 바쳤던 바울이 말년이 이랬습니다. 다 떠나고 누가만 남았습니다. 이 누가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일생인 누가복음을 기록했고, 그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인 사도행전을 기록한 분입니다. 모두들 다 떠났지만, 홀로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서 위대한 역작을 남겼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 위기의 가정

이제 오늘날의 가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하나님 앞에서, 주례자 앞에서, 그리고 하객들 앞에서 서약을 하는데, 그 문구가 이렇습니다. “그대는 이제부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이 어떤 경우에라도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엄숙히 서약하겠습니까?”

대부분 “예!” 하고 대답을 시원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쁠 때는 별 탈이 없다가 슬플 때 사단이 납니다. 건강할 때는 잘 지내다가, 어느 한 쪽이 병이 들면 그때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부유할 때는 아내를[남편을] 사랑하다가도 가난하게 되면 서로 ‘네 탓’을 합니다. ‘부부의 대의’ 같은 것은 그냥 장식품일 뿐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대의’를 잘 지키고 있는 분들입니다. 언제인지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신문에서 감동적인 기사가 실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성정식(成貞植)이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의사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남편을 6년 동안이나 정성스럽게 보살폈습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주문을 외우며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는 환자가 아니다. 그는 내 남편이다!” 그러면서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의식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남편을 아기처럼 껴안고 뽀뽀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식물인간이나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러기를 무려 6년, 도저히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6년 만에 깨어난 것입니다. 의식이 깨어난 남편이 처음으로 꺼낸 첫 마디는 “아멘”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그 옆에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으면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겠습니까?

이분이 늘 마음속으로 외웠다고 하는 말, “이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내 남편이다!” 참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그가 그냥 환자라면, 간병이 끝나는 대로 퇴근하면 그만입니다. 그가 병으로 죽어도 별로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남편’이었기에, ‘부부의 대의’를 지킨 것입니다. 환자라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편이었기에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맺겠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을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그 때에는, 시온에 남아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곧 예루살렘에 살아 있다고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이사야서 4:3). 살아남은 사람들, 곧 생존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얻어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는 예수님 옆에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하나는 나중에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남은 ‘생존자’였습니다. ▶바울이 늙고 쇠약해졌을 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바울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가와 디모데와 마가는 끝까지 옆에 남아서 바울을 보살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남은 ‘생존자’였습니다. ▶조건이 맞을 때는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도 조금만 힘들어지면 깨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조금 전에 소개해 드린 성정식이란 부인은 끝까지 남편을 지킨 ‘생존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많았습니다. 한꺼번에 수천, 수만 명씩이나 몰려들었지만,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신앙인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천만에 가까운 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빵을 얻어먹으러’ 모인 사람 말고, 예수의 도를 따르려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결혼해서 한 집에 산다고 해서 다 부부는 아닙니다. 슬플 때도, 가난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한결같이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생존자 명단’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예수님을 지켜 드려야 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생존자’가 되어서, 예수님 곁에, 교회 안에, 가정을 위하여 끝까지 살아남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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