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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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21-04-24 17: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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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복음서 1:29-34 
설교일 2021-04-25 
설교장소 구미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성서 본문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목음서 1:29-34

 

들어가는 이야기

 

오늘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과 평화의 복을 비롯해서 만복이 함께 깃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큰 복을 받고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방금,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하셨을까, 누가복음서 7:28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요한의 인품을 보고 배우면 되겠지요. 그런데 욕심이 생깁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을까,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요한복음서 1:27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자기는 예수님에 비하면 먼지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 그렇다면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셨기에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인 요한이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큰 인물인지, 얼마나 멋쟁이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조용한 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 1:33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게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요한복음서를 썼다고 전해지는 요한과 세례자 요한은 다른 인물입니다. 참고하시면 좋겠고요, 어쨌든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께 내려왔다는 것인데, 실제로 마가복음서 1:9-10에 보면 이 내용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분명히,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고 했지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성령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어떨 때는 불과 같이 활활 타면서 내려옵니다. 뜨거워서 견질 수가 없습니다. 어떨 때는 물과 같이 세차게 임합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떨 때는 폭풍 같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내려온 성령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땠을까요? 비둘기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비둘기 같이 내려온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예수님에게는 소리소문없이 조용하게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표시 안 나게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유창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병을 척척 고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흔치는 않지만, 그런 일이 있어요. 그리고 그게 과연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인가,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고 사람을 속이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고침 같은 현상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성령을 받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그런 모습으로 성령을 받으셨을까, 그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표시 안 나게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는 모습은 그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날아가는 게 끝이었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충만하게 성령을 받으셨지만,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는 모습은 전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여러분이 늘 경험하는 일이겠습니다만, 접시 물에는 조그마한 조약돌만 하나 떨어져도 상당히 요란합니다. 그러나 강물에는 주먹만 한 돌멩이가 떨어져도 별로 표시가 안 납니다. 바닷물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떨어져도 흔적이 없습니다. 작은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시끌벅적하지만 큰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그저 덤덤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셨지요. 기도를 마치신 후에 세례요한을 찾아가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큰 사람입니까, 요한이 큰 사람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더 크신 분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가는 것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럽습니까? 당연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가야지요. 지금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인 예수님은 요한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요한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 문제인가 하면, 당시에 예수가 크냐, 요한이 크냐, 이런 논쟁이 있었거든요. 그걸 알았기 때문에 요한은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큰 사람의 위용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경쟁자나 아랫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어나서 찾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부모ㆍ자식 사이도 그래요. 먼저 자식들에게 찾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부모라면 그렇게 하고 싶지요. 그렇지만 아무 때나 자식 집에 찾아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것, 그런 게 요즘은 실례가 되잖아요. 부모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자식 집에 쳐들어가는 건 자제를 하는 것이 좋고요. 어쨌든 부모와 자식 사이에 뭔가 좀 껄끄러울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부모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아무튼 조심스럽게 할 일이고요, 자식의 처지에서는 먼저 찾아가는 자세가 정말 필요합니다. 늙은 부모님을 위해서 편안한 집을 사드리는 것도 좋고, 돈을 드리는 것도 좋고, 선물을 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찾아가서 함께 있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젊은 분이었지만 한평생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서 길을 나셨고, 아픈 병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시지 않고, 먼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맨 처음, 세례요한을 찾아가신 일부터 시작된 겁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오셨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한복음서 1:29).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양을 잡아서 속죄의식을 행했습니다. 내가 흘려야 할 피를 양이 대신 흘리게 하는 것이지요. 요한이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어요. 저 양반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안 그래도 되는데, 고생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으니까 그 일만 물려받는다고 하더라도 한평생 밥 굶겠습니까? 거기다가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똑똑한 분이잖아요. 뭘 한들 남들만큼 못 살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는 길로 들어선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나라 고전 가운데 흥부전이 있지요. 거기에 보면, 흥부가 양식 살 돈이 없어서, 관아에서 남이 맞을 매를 대신 맞아주고 돈을 받아오는 장면이 있지요.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옛날 영국 왕실에 플릭 맨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전문적으로 매를 맞기 위해 고용된 매꾼이었습니다. 천하의 귀한 몸인 황태자를 학교에 보낼 수 없잖아요. 궁중에서 선생을 모셔다가 가르쳤는데, 황태자든 누구든 선생이 가르친다고 100% 따라 하는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가끔 말썽을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웁니다. 당시에는 선생이 학생에게 매를 대는 게 문제가 안 될 때니까, 학생이 매 맞을 짓을 하면 매를 대야 하는데, 황태자를 어떻게 때립니까?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교육이 어려워지지요. 그래서 황태자가 잘못하면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다른 아이에게 매질을 하는 거예요. 자기 때문에 억울한 아이가 매를 맞는다, 그러면 그걸 보고 황태자가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런 간접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이어령(李御寧), (문학세계사, 1988), 298. 이런 매꾼들은 돈을 받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돈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요즘 관점으로 보면 바보스러운 짓이지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남이 맞아야 할 매를 스스로 맞으신 거예요.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의 왕이시니까 그분의 아드님인 예수님이 잘못하면 다른 매꾼을 고용해서 매를 맞게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하나님은 거꾸로 하셨어요.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아드님인 예수님으로 하여금 매를 맞게 하셨습니다. 참 기가 막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가 막힌 일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묵묵히 감당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지금은 아이에게 매를 대는 시대가 아닙니다만, 아무리 옛날이라고 하더라도, 왕족이 평민을 위해서 매를 맞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자처하고 나서셨어요. 정말 크신 분 아닙니까?

 

맺는 말씀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그렇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조용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는 것,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멋쟁이이십니다. 그렇게 크신 분이 우리 보고 뭐라고 하셨어요?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친구로 두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크신 분인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잖아요.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은 첫째, 요란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둘째,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셋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이 멋쟁이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81 "깨어 있어라!"
1080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79 요지부동 욥
1078 바울의 폭탄선언
1077 바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산산조각 내다!
1076 “네 죄를 묻지 않겠다!”
1075 작은 씨앗, 큰 나무
1074 안식일 잘 지키기
1073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1072 능력을 입을 때까지
1071 예측 가능한 세상
1070 야곱, 부자 되다!
1069 청출어람(靑出於藍)
1068 야생, 방목, 사육
1067 좁은 문으로 들어간 솔로몬
1066 부활 드라마의 주역들
1065 예수를 찾는 이유
1064 “내가 세상을 이겼다!”
1063 소금과 빛
1062 슬픈 기다림, 복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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