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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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12-04-15 14: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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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복음서 2:13-17 
설교일 2012-04-15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기념주일 
사용처 1. 20240414 한울. 
■ 성서 본문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요한복음서 2:13-17>


■ 들어가는 이야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이 시간을 통하여 힘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은 52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4.19혁명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일을 회고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혁명정신을 실천하셨는지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 착한 예수님?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라는 작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1883년 12월 6일 레바논에서 태어나서 1931년 4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분이 1926년에 ≪모래와 물거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너무나 남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 사람을 어제 세 번이나 만났다. 처음에 그는 창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부랑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서 장사치와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

창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사정했다는 것은, 요한복음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한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왔을 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면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꼼짝 못하게 한 뒤에 여자를 풀어준 사건입니다. 부랑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로 삼아 그들과 어울려 다니셨다는 말씀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고 했지만 요즘 말로 하면 ‘부랑자’ 아닙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장사치들과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은, 성전에서 상품 진열대를 부수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성경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상상 속에는 깨끗한 옷을 입고 거룩한 말씀만 하시면서 고고하게 다니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있었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착하기만 한 선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녀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분이고, 세상에서 천대 받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세상변혁을 꿈꿨던 분이고, 정의롭지 못한 일을 보았을 때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몸을 던져 싸우셨던 분입니다.

■ 아, 4.19

이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혁명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혁명가’라는 이 한 낱말에 예수님의 인품과 생애를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생애에는 혁명가다운 면모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52년 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뛰쳐나왔던 사건, 곧 4.19혁명을 함께 떠올립니다. 1960년 4월 어느 날 아침, 엘 네 살 난 어떤 어린 여중학생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한 장 써놓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가는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도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을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 이문열, ≪변경 3≫(문학과지성사, 1992), 13쪽,

그날 이 어린 여학생은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여학생처럼 4.19때 아까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183명이나 됩니다. 6,259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후 20년쯤 뒤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에는 166명이 사망했고 64명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2,948명이 부상을 당했고, 1,363명이 구속 또는 구금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공식기록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피해가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이런 민중항거는 7년 뒤인 1987년의 6.10항쟁으로 이어집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민주화된 사회에서 투표로 국민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선거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는 독재치하에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민중의 힘으로 국민의 권리를 찾기를 갈망하던 시절에는 투표율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기본이 80%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의 총선투표율은 50%대 중반을 넘기지 못했지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가며 쟁취한 투표권인데, 그 소중한 권리를 유권자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내팽개쳐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 열정아, 나를 삼켜라!

이렇게 투표율이 낮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권 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이익에 따라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까? 경남 선거관리위원회의 한 직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치인은 투표하는 국민만을 두려워한다.” 투표하지 않은 국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엊그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옛날 어느 마을에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놈이 얼마나 사람들을 물어 해치는지, 사람들은 들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걱정하던 중 지혜와 덕이 뛰어난 스승이 나서서 그 뱀으로 하여금 비폭력의 원칙을 실천하도록 설득했습니다. 뱀은 그의 말에 감복하여 이제 사람을 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뱀이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뱀에게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꼬리를 붙잡아 끌고 다녔습니다. 심하게 두들겨 맞은 뱀이 어느 날 스승의 집에 기어와서 불평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비폭력 가르침 때문에 제가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해치기를 그만두라고 했지 겁주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네.” ― 앤소니 드 멜로, ≪일분지혜≫, 분도출판사, 59쪽).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게 좋다고 늘 허허 거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시지는 않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오금 저리게 만들었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말의 ‘개새끼’보다 더 심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을 거침없이 내뱉으셨던 결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장사꾼 천지가 된 성전을 채찍을 들고 쓸어버리던 그 기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뒤에 제자들의 반응이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원래 시편 69: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예수님을 삼켜버릴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그런 열정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맺는 이야기

작년 여름 한진중공업 사태 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eller)의 말은 지금도 옳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에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에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에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의 칼끝이] 나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이르자 내 주위에는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근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을 때, 일각에서는 크게 분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저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이나 유명인사들 문제로 여기고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불의에 침묵함으로써 불의가 판을 치게 그냥 두면 그 불의는 언젠가는 내 목을 죄어오게 될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언제 그런 데까지 마음을 써?’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 둥글둥글하게 살면 되지 왜 그렇게 모나게 살려고 하느냐?’ 하는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열정이 없는 종교는 있으나마나 한 종교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은 배터리 없는 휴대폰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시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시편 69:7-10입니다. “주님 때문에 내가 욕을 먹고, 내 얼굴이 수치로 덮였습니다. 친척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마저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내가 금식하면서 울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향한 열정 때문에, 정의를 향한 열정 때문에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 열정을 불태우셨습니다. 4,19혁명 52주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가지셨던 열정이 우리 안에서도 활활 타오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063 감사의 선순환
1062 예수 스타일의 감사
1061 감사A, 감사B, 감사C
1060 기적? 지혜? 십자가!
1059 빵 이야기
1058 “비웃는 자가 누구냐?”
1057 바라는 것이 있다면
1056 "잠깐 손을 멈추고"
1055 "나를 데려가세요!"
» 열정아, 나를 삼켜라!
1053 폭풍전야, 그리고 평화의 아침
1052 피리를 불어도, 애곡을 하여도
1051 2020.3.1 온라인예배 실황 영상
1050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들
1049 교회가 바로 서려면
1048 전쟁 연습, 평화 연습
1047 느헤미야의 기도
1046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들
1045 개혁, 누가 할 것인가?
1044 먼저 형제자매와 화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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