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전대환 채널 바로가기

성서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설교일 2008-04-13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기념주일 


■ 성서 본문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0-58〉


■ 들어가는 말씀

사람이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모두 마음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을 고생하는 일도, 마음속에서 기쁨이 넘치면 기꺼이 합니다. 그러나 1분도 안 걸리는 수고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죽도록 하기 싫은 법이지요. 이런 것을 가리켜 ‘동기 부여’라고 하는데, 어떤 정당한 동기만 부여되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지요.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고 다 신앙인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도 많고,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것저것 하라고 시키는 것도 많습니다. 우리 신앙의 열조들 가운데는 순교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땀 흘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밤을 지새워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고하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회의(懷疑)가 들 때가 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정죄하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헛된 수고를 해야 합니까?”(욥기 9:29). 물론 그 뒤에 욥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만,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끔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해답을 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바치는 우리의 수고는, 그것이 어떤 방식의 수고이든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피를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모양의 죽음이 있지만, 그 가운데는 아주 특이한 죽음이 두 가지 있습니다. 자살과 순교가 그것입니다. 이 두 죽음에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자기 의지로 죽는다는 것이지요. 병으로 죽는 것이나, 사고도 죽는 것이나, 전쟁으로 죽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다 자기 의지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찾아와서 그렇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와 자살은 둘 다 자기의사로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자살과 순교는 또 상당히 다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지요. 거기에는 자기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순교자에게는 ‘내’가 없습니다. ― 〈사막에서 쓴 편지〉, 한수산, 《먼 그날 같은 오늘》(나남출판, 1994), 355쪽.

그러니까 자살은 일종의 ‘죄’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만 편하게 되려고 죽음을 택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순교는 ‘죄 없는 죽음’입니다. 꼭 순교가 아니더라도 ‘죄 없는 죽음’이 있지요. 오늘이 4.19혁명 기념주일입니다만, 지금부터 48년 전, 이승만 정권의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기 위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피를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쓴 ≪태백산맥≫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자가 흘린 피에는 고통이 있을 뿐이지만 죽은 자가 남긴 피에는 주술이 살아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남긴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저주하는 영혼인 것이다.” 조정래, 《태백산맥 1》((주)해냄출판사, 1996), 166쪽.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민수기 35:33).

조정래 씨는 ‘죄 없이’ 죽은 사람의 피를 ‘저주하는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 없이’ 죽은 사람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고 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세기 4:10). 이렇게 땅에서 울부짖는 피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이 조금 전에 읽어드린 민수기 35:33의 말씀입니다. 피로 얼룩진 땅은 피로써만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정말 피로 피를 씻는 하나님의 ‘복수혈전’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피 흘림’에 있어서는 공짜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놓은 방책이 ‘내가 죽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임마누엘’ 아닙니까?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사람들의 피로 ‘억울한 피’를 갚으려니까 인생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대신 죽어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억울한 피’를 씻어내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억울한 피’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 피를 절대로 그냥 놓아두시지 않습니다.

■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땀을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소설가 한수산 씨가 쓴 소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남자의 손은 세 가지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여자의 손을 잡거나, 술잔을 잡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을 하거나.” ― 〈겨울 안개는 깊지 않다〉에서. 한수산, 《먼 그날 같은 오늘》(나남출판, 1994), 82쪽.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손을 주신 것은 술잔 잡는 데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자 손목 잡는 데만 쓰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한 가지, 일하는 데 쓰지 않으면 그것은 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 아담에게 ‘땀 흘려’ 일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창세기 3:19).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고 했지요. 먹을 수 없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은 상태이지, 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땀을 흘려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흘리는 양은 다르겠습니다만, 사람이 땀을 흘리지 않으면 건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사우나 가서 땀 빼는 것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땀이 아닙니다. 갑자기 외부 온도가 올라가니까, 안 죽으려고 몸이 흘려내는 수분이지요. 사우나에서 심하게 땀을 흘리면 큰일 납니다.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흘리는 땀은 우리 몸에 해로운 노폐물과 중금속을 몸 밖으로 내보내지만,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성분을 빠져나가게 합니다. 칼슘, 칼륨, 마그네슘, 인 등 이 술술 빠져나가 버려서, 탈수 현상이 생기고, 전해질 균형에 이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을 해서 땀을 흘려야 합니다. 요즘에는 땀 흘리는 ‘노동’이 예전보다는 적어졌습니다만, 어쨌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랬지요.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기 8:3). 사람이 빵만 먹으면 배밖에 더 나옵니까? 요즘 복부비만이 가장 위험한 증상이라고 하지 않아요? 저도 배가 많이 나왔습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잘 버티는 것은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함께 먹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나는 어떻게 땀을 흘릴 것인가, 교회 일을 위해서 어떻게 땀을 흘릴 것인가, 방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땀 흘리지 않고 은혜 받으려고 하는 신자들이 많지요. 그것은 일해서 땀 흘리지 않고 사우나 가서 땀 흘리는 효과 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불교 신자는 탑돌이하도 하지요. 부처님 앞에서 절이라도 하지요. 가톨릭 신자들도 우리보다는 몸을 많이 씁니다. 탑돌이든, 백팔 배든, 삼천 배든,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 있어서는, 안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는 몸 움직일 일이 너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배 시간에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힘도 주시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그랬지요. “너희는 맥 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이사야서 35:3). 어떻게 해야 맥 풀린 손이 힘을 씁니까? 어떻게 해야 50견 때문에 고생을 안 합니까? 어떻게 해야 떨리는 무릎이 굳세게 됩니까? 어떻게 해야 관절염 때문에 고생을 안 합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몸을 움직여 봉사해야 합니다. 땀 흘려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50견이나 관절염이 일 안 해서 생긴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땀 흘려 주님의 일을 하고, 땀 흘려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땀을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거기에다가 덤으로, 우리의 건강까지 챙겨 주십니다.

■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기도를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한 피’를 헛되게 하시지 않는다고 했지요. 우리의 땀을 헛되게 하시지 않는다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서 22:44에 보면,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경지에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기도도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도 피 흘리는 일이고, 땀 흘리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라고 다 기도는 아니지요. 이사야서 1: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손에 피가 가득한 사람의 기도는 안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유추해서 생각해보면, 주님을 위해서 땀 흘리지 않는 사람의 기도도 안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억울한 피를 흘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주님 나라를 위해서 땀을 흘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할 때, 개인을 위한 기도, 가정과 가족을 위한 기도, 남을 위한 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 이런 기도들을 들어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게 두시지 않습니다.

행여 지금까지는 억울한 피를 흘리게 하는 일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방관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위한 일에 땀을 흘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마음을 다잡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이제부터 사람이 달라집니다. 때가 왔을 때,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일,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일,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일, 순서는 바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운동경기로 생각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피 흘려 순교하는 사람과 의를 위하여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선수’입니다. ▶피까지는 흘리지 못하지만, 땀 흘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선수단’입니다. ▶그렇게까지는 못 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위해서 피 흘리고 땀 흘리는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응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월계관을 씌워 주실 때, ‘선수’도 영광이지만, 그것은 선수와 함께 고생한 ‘선수단’에게도 영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열심히 응원한 ‘응원단’에도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노고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어쨌든,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는 것이 피든, 땀이든, 기도든, 그 어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조금도 헛되게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이 저와 여러분 위에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1042 "머물러 있어라!"
1041 "남편 된 이 여러분!"
1040 밥상, 아 그 거룩함이여!
»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1038 완전 무장
1037 소중한 것을 전할 때
1036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1035 주님의 이슬
1034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1033 교회교육의 중요성
1032 우리 삶의 목표는?
1031 멋진 남자
1030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 (2)기도의 사람
1029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1028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1027 주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
1026 생기에게 대언하라!
1025 고백하라!
1024 제자들을 살리신 예수님
1023 낮아지라!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