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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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7:10-17 
설교일 2006-03-26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 그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미워하시는 저 두 왕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가 갈라진 때로부터 이제까지, 이 백성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재난을, 주님께서는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의 아버지 집안에 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앗시리아의 왕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7:10-17)


■ 들어가는 말씀

올해, 2006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지침으로 삼기로 한 말씀을 다 같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려면 싹수가 좋아야 하는데,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진지한 사람’을 불러 쓰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불러서 쓰신다는 말씀을 드리고, 다음 주일에는 하나님께서는 ‘열정이 있는 사람’을 불러서 쓰신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사야는 참 진지한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의 문제를 깨닫고 다른 데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갔다고 했지요? 거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사야도 모자란 데가 많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제단의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주었습니다. 입술을 어떤 방법으로 지져주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사야를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말이지요.

1. 이사야 시대 이야기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보면 이사야가 유다의 아하스 왕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아하스 왕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는데, 북쪽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시리아와 연합을 해서 남쪽 유다를 치려고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제발 떨지 말라고 이야기하러 간 겁니다. 쓸데없이 무서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설 것이다, 이렇게 노래를 불렀지만 아하스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래, 그럼 너 어떻게 하면 믿을래? 네가 한 번 요청해봐라. 그럼 내가 보여 줄게.”

사사시대에 기드온이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기 전에 두려워하니까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주신 일이 있습니다. 또 모세보고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고 하니까 모세가 두려워했지요. 그 때도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조를 보여 주시는데, 아하스는 그것도 거부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합니까?” 말은 바른 말이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고 핑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래, 알았다. 네가 싫다면 구하지 마라. 그렇지만 내 백성을 위해서 내가 뭔가 하나 보여줄 게 있어.” 그게 뭔가 하면 이런 겁니다. “자, 이제 어떤 처녀가 아이를 낳을 거야.” 여기서 처녀라고 된 것은 칠십인역의 번역이고, 히브리어로는 ‘젊은 여자’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중에 예수님께 적용이 되었지만, 이사야 시대의 이 이야기에서는 ‘젊은 여자’로 보는 게 좋습니다. 어쨌든 이런 이야깁니다. “어떤 처녀가 아이를 낳을 거야. 그런데 그 여자는 아이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 붙일 거야. 그 아이가 점점 자라겠지. 철도 들어가겠고…. 그런데 그 아이가 철이 들어서 물불을 가리고, 잘잘못을 따질 나이가 되면, 이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야.”

자,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보통 철드는 나이를 언제쯤으로 봅니까?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했으니까 한 스무 살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20년 이내에 전쟁이 나서 나라에 송두리째 흔들릴 거라는 이야깁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니까, 기원전 742년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사야서 6장을 읽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바로 아하스를 찾아갔으니까 처녀가 아들을 낳을 거라고 하는 이 예언은 기원전 742년에 한 겁니다.

이때부터 거의 정확히 20년 후, 기원전 722년부터 721년 사이에 북쪽 이스라엘은 당시 최대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에게 망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 그대로 들어맞았지요.

2. 임마누엘

그런데 이 ‘젊은 여자’가 낳을 거라고 한 ‘임마누엘’이라는 아이는 그 때에 ‘버터와 꿀’을 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7장 21절과 22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날에는, 비록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그것들이 내는 젖이 넉넉하여, 버터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여자에게서 태어날 아이뿐만 아니라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버터와 꿀을 먹는다는 거예요. 여기서 그 땅은 북쪽 이스라엘 땅을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전쟁이 나서 북쪽 이스라엘에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인구밀도가 현저히 줄게 되리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만 기르더라도 먹이가 충분하니까 버터와 꿀을 마음껏 먹게 될 거라고 한 겁니다.

이 아이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런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비록 나라가 반쪽이 망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지금이야 버터나 꿀이나 다 흔하지만, 옛날에는 그게 귀한 음식이었거든요.

3. 기도에 대하여

성서의 배경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하도록 하고, 기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이사야를 불러서 쓰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기도하는 사람을 불러서 쓰실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니까요.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과 통하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기도한 하나님과 통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저 사람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게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하나님과 마음이 통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만족해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통해야 하고, 하나님하고만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과도 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도 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임마누엘’입니다.

대통령이 이번에 총리를 지명했지요. 옛날 정권처럼 그냥 총리가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내치를 책임지는 ‘책임 총리제’를 한다고 했으니 잘 골라야 합니다. 이젠 총리가 일일이 대통령에게 결제를 받아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것은 혼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책임 총리제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기본으로 능력과 도덕성은 있어야겠고, 그 다음은 뭘 보고 뽑겠습니까? 당연히 대통령과 잘 통하는 사람을 뽑을 겁니다. 물론 한명숙 지명자가 대통령과 같은 당에 있었으니 일반적인 것은 잘 알 겁니다.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고심을 했다고 했는데, 그건 아마도 누가 나와 가장 잘 통할까,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서 고심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려고 합니다. 기본으로 그 심부름을 잘 해낼 사람을 찾겠지요. 도덕성도 있어야 할 겁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보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와 얼마나 잘 통하느냐, 역시 그걸 보시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은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려면 하나님과 잘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잘 통할 수 있도록 평소에 늘 대화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과 잘 통하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사람하고는 또 왜 잘 통해야 하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입니까? 전부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냥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봐야 합니다. 이번 주간에 결혼기념일이 있는 분들이 많은데, 결혼을 해서 아내나 남편을 맞이할 때, 그 사람은 내 아내, 내 남편이기도 하지만, 귀한 집 아들이고, 귀한 집 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얼마나 귀하게 컸을까,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자랐을까,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대하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욕을 하면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욕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욕해놓고 하나님과 잘 통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서 5:23-24)라고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 거기에 내가 함께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두세 사람, 이건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과 화목한 자리, 거기에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연과는 또 왜 잘 통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금오산에 자주 간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건 심심해서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서도 아닙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갑니다. 건강을 생각해서 운동 삼아 가는 뜻도 있지만, 우리 도시생활에서 흙을 밟을 기회가 없잖아요? 사람이란 흙과도 통해야 하고, 나무나 꽃과도 통해야 하고, 동물과도 통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기회를 만나기가 쉽지도 않고, 사실은 찾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보에 꽃 사진이 매주 올라가지요. 아마 여러분은 별 감흥을 못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계절에 따라서 바뀌는 식물을 볼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오늘 주보에는 매화 사진이 실렸습니다만, 그건 그냥 매화가 아닙니다. 작년에 봤던 매화, 지난여름에 봤던 매화, 그리고 지난겨울에 그 엄동설한을 꿋꿋하게 견딘 매화, 그 매화가 또 한 해를 지나 이렇게 활짝 꽃을 피우니까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제는 매화가 그냥 매화가 아니라 ‘거룩한 생명’으로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해주는 나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맑은 공기…,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이런 것들에 애정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오염시키며 하나님과 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감사하며 산에 한 번 다녀오는 것도 대단히 훌륭한 기도입니다.

오늘 신약성경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자연을 복종시키셨다고 했지만, 이 표현은 사실 온유하신 예수님께 잘 안 맞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자연과 잘 통하셨기에 자연과 대화가 가능하셨을 겁니다.

■ 맺는 말씀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나라가 머지않아 한 쪽이 망하게 생겼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꾸 사람의 방법을 쓰려고 했던 탓에 맞게 된 결과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지금이라도 그렇게 완전히 망하지 않도록 하고 싶으실 겁니다. 백성들이 정 말을 듣지 않아 나라가 반쪽이 망하더라도, 아니 두 쪽 다 망하더라도 그루터기는 살려놓아야 하겠기에, 그런 수습을 하시려고 긴급히 이사야를 부르신 겁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이사야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오늘 말씀드린 것처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성전으로 달려갔다는 것, 그리고 다음 주일에 말씀드릴 내용이지만, ▶이사야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통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다른 사람들과 통하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통하는 길입니다. 또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사람들과 통해야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섭리를 이용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돼야 하나님의 심부름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하고 선뜻 나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41 "머물러 있어라!"
1040 "남편 된 이 여러분!"
1039 밥상, 아 그 거룩함이여!
1038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1037 완전 무장
1036 소중한 것을 전할 때
1035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1034 주님의 이슬
1033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1032 교회교육의 중요성
1031 우리 삶의 목표는?
1030 멋진 남자
»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 (2)기도의 사람
1028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1027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1026 주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
1025 생기에게 대언하라!
1024 고백하라!
1023 제자들을 살리신 예수님
1022 낮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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