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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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7-04-22 14: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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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26:19-21 
설교일 2007-04-22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부활절 


■ 성서 본문

주님,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걸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사야서 26:8)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나의 백성아! 집으로 가서,
방 안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가서 문을 닫고,
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잠시 숨어 있어라.”

주님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셔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니,
그 때에 땅은 그 속에 스며든 피를 드러낼 것이며,
살해당한 사람들을 더 이상 숨기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서 26:19-21)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여 우리는 일곱 주간을 부활의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을 말하려면 먼저 죽음을 말해야 하는데, 부활하시기 사흘 전에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상당히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는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볼 때 4월쯤입니다.

■ 사월에 죽은 사람들.

그러고 보니까 1945년 4월 9일,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사형을 당하셨지요. 1865년 4월 15일에는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노예해방을 위해서 애를 쓰다가 반대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4월 4일에는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역시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1960년 4월 19일에는 우리나라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4월을 일컬어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데, 글쎄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존경하는 분들 가운데서 유난히 4월에 목숨을 잃은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본회퍼 목사님도 그랬고, 링컨 대통령도 그랬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도 그랬고, 4.19 희생자들도 그랬습니다. 모두 4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건 아마도 4월이면 생동하는 만물과 더불어, 사람의 마음에도 새 기운이 살아나는 시기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생기가 솟으니까 당연히 악기(惡氣)도 따라 돋게 되겠지요. 그래서 의인들을 죽이는 살기(殺氣)도 더 등등해져서 4월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7일, 버지니아 공과대학에서 총기난사사건으로 아까운 사람 33명이 죽었습니다. 18일에는 이라크에서 폭탄테러가 네 건이나 연달아 일어나 200여 명이나 죽었습니다. 억압에 항거하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버지니아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들과, 이라크에서 희생당한 사람들과, 아까 말씀드린 분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 원혼들의 울부짖음.

성경에 보면, 인류 최초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아벨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창세기 4:10-12).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울부짖는다는 것입니다. 땅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를 받아 마셨으니, 이제 땅은 예전의 ‘착하던’ 땅이 아닙니다. 밭을 갈아도 효력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 위에서 편안히 쉬지도 못하게 합니다. 땅이 단단히 화가 난 겁니다. 어머니처럼 사람을 보듬어 안고 온갖 혜택을 주던 그런 땅이 아닙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흥 동안 무덤에 계실 때도 예수님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피, 링컨의 피,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피, 이라크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 버지니아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가 지금도 땅에서 울부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동학혁명 때, 일제강점기 때, 6.25 때,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피가 지금도 땅에서 울부짖고 있을 것입니다. 이 원귀(寃鬼)들의 울부짖음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민수기 35장 3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가 땅에 떨어져서 땅이 화가 나면 다른 방법으로는 이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를 마셔야 땅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살해자를 잡아 죽여서 그 피를 땅에 쏟아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몸소 가르치셨던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마태복음서 23:35). 사랑도 좋고 용서도 좋지만, 땅이 머금은 억울한 사람들의 피는 말로 용서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살해자의 피를 마셔야 저주에서 풀려납니다.

■ 보혈의 능력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억울하게 피 흘리게 한 살해자들을 모조리 잡아내서 쳐 죽이면 되겠습니까? 그들의 피를 땅에 쏟으면 저주에서 풀려나겠습니까? 옛날 모세 시대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피는 다른 피를 부르고, 또 그 피는 더 큰 피를 불렀습니다. 피의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보복의 연속이고, 한의 연속입니다. 한 번의 보복으로 보복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보복을 낳습니다. 한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한이 계속 쌓여만 갑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율법이 잘못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처럼 인간은 완전한 판결을 내리지 못합니다. 무협지 같은 데서도 보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들이 수십 년 동안 칼을 갈며 무술을 익힙니다. 어떻게 해서 복수에 성공하면 그걸로 문제가 해결됩니까? 이번에는 당한 사람의 아들이 칼을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이렇게 한참 가다가 보면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복수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억울하게 죽어서 땅에 쏟은 피는 반드시 정화되어야 합니다. 다른 피를 땅에게 주어야만 해결이 되는데, 살해자의 피를 땅에 쏟으려니까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하나님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피해자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가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히틀러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미국인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이라크인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시아파 사람들의 아버지요, 동시에 수니파 사람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버지니아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들의 아버지인 동시에 조승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이를 어쩝니까? 살인자도 아들이요, 피해자도 아들이니까, 그냥 덮어두어야 하겠습니까?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께서 그렇게는 또 못하십니다. 반드시 죄는 갚고 가야 합니다. 한 아들을 죽였다고, 다른 아들을 죽인다면 아들을 둘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부모 마음에, 이것도 안 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고심에 빠진 하나님께서 해결책으로 생각해내신 것이 ‘내가 죽자!’입니다. 살인한 아들 대신에 내가 죽자는 겁니다. 내 피를 땅에 쏟아서 원귀의 한을 풀자는 이야기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지요? 말씀은 하나님입니다. 육신은 예수님입니다. 영이신 말씀에 피가 있습니까? 없지요. 영이신 하나님께서 피를 못 흘리니까, 피를 흘릴 수 있는 육신이 되신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으셨고, 그 피가 땅에 스며들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보혈의 능력’이라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 맺는 말씀

버지니아 공과대학 캠퍼스 중앙 잔디밭, 드릴 필드에는 이번 참사에 죽은 33명을 기리는 추모 돌들이 타원형으로 놓여 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는 조승희 씨를 위한 추모석도 있는데, 거기에는 “2007년 4월 16일, 조승희”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바바라(Barvara)라는 사람이 이런 쪽지를 써놓았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했지만, 그 누구도 너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바바라”(I feel bad in knowing that you did not get help that you so desperately needed. I hope in time that your family will find comfort and healing. God bless. Barvara).

기분 같아서는 죽은 조승희의 시체라도 다시 찢어발겨서 복수를 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런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미국 땅에 예수님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미국이지만, 그 사회가 아직 건재한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이사야서 26:19).

미국인 33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연일 온 세계가 떠들썩하지만, 바로 다음 날 이라크인 200여 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언론들이 대수롭지 않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죽은 시체들이 모두 일어나 즐겁게 노래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이든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원귀들의 한은 인간이 풀어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한을 풀려고 하다가는 사고만 치기 십상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오직 주님께 희망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살해자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생기를 머금은 주님의 이슬이 땅을 적실 것입니다. 그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때, 이 세상의 원한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보복의 악순환이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면, 지금도 한을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서, 내가 피를 흘리더라도, 살해자의 피 대신 나의 피를 땅에 쏟아서라도, 보복의 고리를 끊고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반드시 우리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생기 있는 주님의 이슬을 받아서, 모두 일어나 한을 풀고 기쁘게 춤을 추는 그날까지, 우리와 그들이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걸고 새 힘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42 "머물러 있어라!"
1041 "남편 된 이 여러분!"
1040 밥상, 아 그 거룩함이여!
1039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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