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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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8-08-17 13: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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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열왕기하 15:1-14 
설교일 2008-08-17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 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 온 적이 있었다.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시리아 왕에게 나아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온 한 소녀가 한 말을 보고하였다. 시리아 왕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으니, 가 보도록 하시오.”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왕의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낙담하여, 자기의 옷을 찢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 이스라엘 왕이 낙담하여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 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 못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하였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

〈열왕기하 5:1-14〉


■ 들어가는 말씀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야고보서 4:6). 욥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엘리바스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쓰러지거든, 너는 그것이 교만 때문이라고 일러주어라.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욥기 22:29).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그것은 교만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기 때문에, 일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교만하지는 않은지 점검해보고, 좀 더 낮아져야 할 필요는 없는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 나아만 장군 이야기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으로서,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졸지에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병이 양성으로 판명 날 경우, 그의 명성은 물론 정치인생까지 끝장이 날 판국입니다. 아니, 정치인생이 끝날 뿐만 아니라, 이 병을 고치지 않으면 친척과 가족으로부터도 격리된 채 외롭게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여종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훌륭한 예언자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왕의 협조를 얻어서,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선물도 바리바리 실었습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말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사환이 말했습니다. “장군님, 엘리사 예언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님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그러나 부하들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했습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 나는 겸손한가?

나아만은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인품도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디 한 군데 부족한 곳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주셨습니다. 나아만이란 인간은 거의 완벽한데, 한 가지 에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교만하든 말든 상관을 안 하시지만, 이거 좀 쓸 만하다 판단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교만하도록 절대 그냥 놓아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 그러면 우리는 대부분 남의 이야기인 줄 알지요. 나는 결코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는 교만한 사람인가, 겸손한 사람인가, 아주 쉽게 판단해볼 수 있는 기준을 나아만 장군이 제시해주었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지시하였을 때, 나아만은 크게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 왜 화를 냈습니까? ‘감히 제까짓 게 어떻게 나에게 그런 대접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언자 주제에, 나 같이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에게 성심성의껏 대해야지, 어떻게 그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만 전달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우리도 나아만과 비슷한 데가 참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두고 그런 생각 많이 하지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그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친구 사이나 친척 사이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어?” 그 대상이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게 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합니다.

■ 겸손이란 죽어지내는 것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물론 이 말은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한다’ 또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바울은 목숨 내놓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나 죽었소!’ 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날마다 죽은 듯이 지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죽은 듯이 지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탈무드에 아주 적절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랍비가, 제자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제자를 무덤에 데리고 가서 말했습니다. “저 무덤들을 향하여 박수를 쳐보아라.” 제자가 열심히 박수를 쳤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더냐?”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들에게 욕을 퍼부어보아라.” 제자가 있는 욕, 없는 욕을 해댔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더냐?”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 맞다. 그게 죽은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죽어지낸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죽은 듯이 살면, 서운할 일도 없습니다. 속상할 일도 없습니다. 불평할 일도 없습니다. 원망할 일도 없습니다. 죽은 듯이 사는 사람은 옆에서 환호하며 박수를 쳐도 흥분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욕을 바가지로 해대도 냉정할 수 있습니다. 함께 부대끼며 사는 사람이 아무리 나를 부당하게 대우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내가 쏟은 정성을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 맺는 말씀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몸이 머리 위로 올라가면 그것은 기형입니다. 그것은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곳으로만 가셨던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온간 비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예수님보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더 비천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죽어야 합니다. 저도 죽고 여러분도 죽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1041 "머물러 있어라!"
1040 "남편 된 이 여러분!"
1039 밥상, 아 그 거룩함이여!
1038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1037 완전 무장
1036 소중한 것을 전할 때
1035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1034 주님의 이슬
1033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1032 교회교육의 중요성
1031 우리 삶의 목표는?
1030 멋진 남자
1029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 (2)기도의 사람
1028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1027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1026 주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
1025 생기에게 대언하라!
1024 고백하라!
1023 제자들을 살리신 예수님
» 낮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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