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전대환 채널 바로가기

성서본문 요한복음서 10:1-6 
설교일 2008-04-06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0:1-6〉


■ 들어가는 말씀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이 많은 칭호 가운데서 오늘은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목자이시라면, 그 다음에는 어쩌란 말이냐, 우리 편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니 우리는 그 품안에서 행복하게 살자, 당장 이런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 다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듣기 좋은 말이 “내게로 와서 쉬어라!” 하는 말씀일 겁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가 예수님께 와서 복 받고 쉬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게 배워라!” 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주저함이 생깁니다. 예수님께 배우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숫자가 확연히 줄어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배우는 것 자체는 그리 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 “나를 따르라!” 하실 때는 와르르 떨어져 나갑니다. 극소수만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왔으면 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합니다. 배웠으면 그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쉬기만 하는 것은 ‘소비’ 구조입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단계가 되면 그것은 ‘현상유지’ 구조입니다. 그 다음 단계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물려받을 때, 비로소 ‘재생산’ 구조, 곧 흑자 구조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목자 예수’라는 칭호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재생산’ 구조에 참여하려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서 15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 가치입니다. 그러면 어떤 목자가 될 것인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따라하면 됩니다.

■ 문으로 드나듭시다.

첫째, 예수님은 ‘문으로’ 드나드는 목자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문으로’ 드나드는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문으로 드나드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입니다. 마당으로 들어갈 때 담을 넘어 들어간다든지,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창문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도둑들이나 할 일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 1절에서 그랬지요.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예수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든지 벽을 뚫고 들어간다든지, 하는 비정상 방법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편법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그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손쉽게 사람을 제압하시고 지배하시기 원하셨다면 마귀가 예수님께 왔을 때, 마귀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돌로 빵을 만들어먹으면 얼마나 손쉽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거부하셨지요. 빵이라고 하는 것은 땀 흘려 농사를 지어서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 먹는 것이지,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듯이 그런 식의 불로소득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얼마나 폼이 납니까? 백 마디의 말보다도 그런 퍼포먼스 하나가 더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법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치거나 죽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데, 왜 그 섭리를 깨느냐, 이것이지요.

비노바 바베라고 하는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양반은 부자를 설득해서 가난한 사람들 돕도록 유도하느라 애를 쓴 분이지요. “여기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당신은 그 집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벽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머리만 깨질 뿐입니다. 그 때 만일 당신이 작은 문 하나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문을 찾아야만 합니다. 내가 지주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잘못과 단점이 있고, 그의 이기심은 높은 담벼락처럼 완강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선량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문을 찾을 의지만 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의 결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문을 찾으십시오. 나는 모든 자본가와 지주에게서 그 작은 문을 찾고 있습니다. 그 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그의 단점들을 내 머리로 들이받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 비노바 바베(김문호 역/사티쉬 쿠마르 편), 《버리고, 행복하라》(산해, 2003), 8-9쪽.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 닮은 목자가 되려고 할 때, 결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문으로 드나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려고 할 때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엉뚱한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납득하는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로 드나들어야 합니다.

■ 생명의 문이 됩시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 다 기억하실 겁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한복음서 14:6).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 편에 줄을 서야 천당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서 5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압니까? 그들이 성경을 차근차근 읽고 예수님을 알기를 바라고 앉았을 수는 없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님 노릇을 해서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명의 문’이 되어서,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오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시편 41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 사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생명의 문’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작정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우리에게도 큰 보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41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이런 겁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구해 주신다(1). ▶이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2). ▶주님께서 그를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2).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돌보시며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3).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명의 문’ 노릇을 할 때, 이처럼 우리에게 올 보상은 대단한 것입니다. ‘생명의 문’인 우리가 재난을 당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재난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생명의 문’인 우리가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우리 운명을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인 우리가 아프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들어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도 돌보시고,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 이름을 부릅시다.

셋째, 예수님은 양떼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 봉건사회는 신분 차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상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너와 나는 동등한 관계이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뒤에 아담에게 동물들을 맡기셨지요. 그때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여자의 이름도 지어주었습니다.

옛날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절에 국어 교과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이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언제부턴가 바뀌었지요. 최초의 공교육에서 왜 바둑이부터 배워야 하는가, 아마 그런 문제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둑이’는 이름이 아니에요. 검은색, 흰색이 알록달록하게 있다고 해서 그냥 바둑이라고 한 것이지요.

사람 이름 가운데도 예전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김간난’은 갓난아기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 ‘박아기’도 그냥 이름이 없는 이름이고, ‘이끝순’은 제발 딸 좀 그만 낳으라고 붙여준 이름이고…. 이른바 ‘상것’들은 이름다운 이름이 없었습니다. 양반들은 항렬이다 뭐다 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의미심장한 이름들을 지어주지만, ‘아랫것’들은 절대로 상전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그냥 붙이는 것이지요.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양떼들의 이름을 불러주신다는 것은 양떼를 예수님과 동등한 레벨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사람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처럼 ‘목자’가 된다고 할 때, 그 기본 정신은 ‘인간 평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나 하셨는데, 마태복음서 5장 39절 말씀이 그겁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물론 이 말씀은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당시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또 다른 것을 생각했을 겁니다. 당시에 상전들이 아랫것들의 뺨을 때릴 때, 손바닥으로 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손바닥이라고 하는 것은 음식을 먹을 때도 쓰고, 자기 자신을 만질 때도 쓰는 신체인데, 그 귀한 것을 ‘아랫것’들의 천한 몸에 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손등으로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대부분 오른손잡이니까, 오른손 등으로 상대를 때리려면 어디를 때리게 됩니까? 상대의 오른뺨을 때릴 수밖에 없지요. 만일 맞은 사람이 상대의 손등으로 맞았다면, 그것은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는 뜻 아니에요? 그래서 왼쪽 뺨을 돌려대며 ‘거기 때리지 말고 손바닥으로 이쪽을 때려라!’ 하고 대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지나가는 이야기였습니다만, 어쨌든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우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당연히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 맺는 말씀

베드로전서 5:2-3에 이런 권고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 사람들의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첫째, 편법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으로(문으로 드나드는)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보는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생명의 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의 이름을 귀하게 불러주는 ‘평등’의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목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우리 위에 주님의 평화가 언제나 넘쳐 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322 생수를 강물처럼
321 예수님처럼 달라져 보아요!
320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319 광야에서 깨달은 것
318 "깨어 있어라!"
317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를!
316 빛에 속한 사람
315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그를 위하여!
314 괴담, 유언비어, 예언
313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312 믿음의 어머니들
311 사무엘처럼
310 "머물러 있어라!"
309 지금 이 나라에서는
308 그리스도의 사람
307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십시오!”
305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 마라!
304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303 주님의 문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