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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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11:1-9 
설교일 2007-12-25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성탄절 


■ 성서 본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1-9〉


■ 들어가는 말씀

어제 우리가 각자 준비한 선물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따로 선물을 준비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선물을 받는 기쁨은 아이나 어른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얻는 기쁨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어릴 때 해마다 경험했던 아버지의 생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정말 기쁜 날이었습니다. 맛 나는 음식이 많아서 좋았고, 손님들도 북적대니 그것도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가끔씩은 저에게도 조그마한 선물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덕에 얻는 기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을 기념해서 우리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불듯이’ 예수님 덕에 우리가 기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서로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즐거운 시간도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얻는 진짜 기쁨은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어떤 기쁜 일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도대체 어떤 복된 일이 있는가, 오늘은 이사야서 11장 말씀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 첫째,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지혜로움과 총명함이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지혜와 총명의 영’을 내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총명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총명함은 소년 시절부터 증명이 되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부자 되기’와 관련된 책들을 보면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부자들과 놀아라!’ 하고 가르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말은 맞습니다. 부자와 놀아야 부자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공부 잘 하는 친구와 놀아야 덩달아 공부를 잘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우리는 더 지혜롭게 됩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 총명하게 됩니다.

인디언 족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식을 추구하지 말고 지혜를 추구하라. 지식은 과거의 산물이다 지혜는 미래를 가져다준다.” (인디언 람비 족의 격언) ― 에리코 로(김난주 역),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주식회사열린책들, 2004), 79쪽.

우리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 공부를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뜻에서,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과거의 산물일 뿐입니다. 남이 해놓은 것을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미래를 가져다줍니다. 지혜는 현재의 일을 판단하여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은 남을 쳐다보고 따라가지만,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남보다 앞장서서 남을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사한 일입니다.

■ 둘째,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공정함이 보장됩니다.

본문 3절부터 5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추구합니다. 약한 사람들을 우선 보호하기보다는, 약자들에게는 ‘떡고물’이나 먹으라고 던져주고, 강자들은 무한정 누리고 살자, 그런 판이지요.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시는 세상에서 이런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는 분이 아닙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단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잔인한 자를 치는 몽둥이입니다. 그분은 사악한 자를 철저하게 징계하는 분입니다.

예전에 법정에 가서 재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때는 판사들이 재판하러 온 사람들을 얼마나 윽박질렀는지 모릅니다. 원고나 피고가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금방 소리를 칩니다. “그러니까 요점이 뭡니까? 간단하게 말하세요.” 아니, 세상에, 사건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요점만 잘 추려서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왜 그러고 있겠습니까? 자기가 직접 변호사를 하든지, 준비서면을 작성해서 제출하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변호사 살 돈도 없고 준비서면 작성도 잘 못하니까 그러고 나와서 하소연을 하는 것인데, 판사들은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판사 잘못만은 아니지요. 사건은 많지, 시간은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 못하더라도,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시간제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밤새도록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한 일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 셋째,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부터 9절까지는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주님께서 오시면, 아니 지금도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분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평화만 존재합니다. 2차 대전 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차디찬 겨울이었습니다. 12월 24일 성탄 전야에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살벌한 전쟁터였지만 이날 밤도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밤은 고요하고 적막해져갔습니다. 이 고요함 가운데서, 참호 속에 앉았던 한 프랑스 병사가 고향생각을 하며 무심코 낮은 휘파람 소리로 성탄 캐럴을 불렀습니다. 이 휘파람 소리가 적막한 강 주변을 잔잔히 울려 퍼졌습니다. 그 애달프고 잔잔한 휘파람은 이내 강 건너편의 독일 병사의 마음을 향수에 잠겨버리게 했습니다. 독일병사가 그 멜로디를 따라 마음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 후에는, 아군과 적군의 캐럴 멜로디가 함께 강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의 성탄을 그리워하던 모든 병사들이 이 합창의 멜로디를 듣고는 다 함께 부르게 되었습니다. 고요하고 적막한 강은 캐럴의 향연이 되었습니다. 아군도 적도 없는 성탄의 밤이었습니다. 피 흘리며 서로 싸워야 하는 병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성탄을 축하하며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람의 마음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가의 캐럴 향연은 적과 아군이 한 자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로 이어졌고, 즐거운 파티까지 열게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오직 ‘크리스마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비록 서로 전쟁하는 사이였지만 그날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평화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 맺는 말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지혜와 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공정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의 지혜와, 주님의 공평하심과, 주님의 평화가, 한 자리에서 성탄을 축하하는 저와 여러분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축원합니다.
302 떠남과 따름
301 처음 사랑을 가지라!
300 새내기들의 다짐
299 기쁘고 흡족한 날
298 버림으로써 얻는 행복
297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
296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복
295 몸으로 담 허물기
294 온 생명을 충만케 해주십시오!
293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292 교회가 번성하려면
»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
290 베들레헴의 작은 길
289 희망 전도사
288 행복한 마리아
287 그 후에야 하나님이 들으시리라!
286 내가 이 일을 지체 없이 이루겠다!
285 행복해지는 셈법
284 이렇듯 한해를 영광스럽게 꾸미시니
283 그대 심장에 생명이 고동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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