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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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사도행전 4:13-22 
설교일 2006-12-10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대림절 


■ 성서 본문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트집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의회에서 나가게 한 뒤에, 서로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합시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이 모두 그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할 방도가 없어서, 다시 위협만 하고서 놓아 보냈다. 이 기적으로 병이 나은 이는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다.

(사도행전 4:13-22)


■ 들어가는 말씀

이사야서 55장 1절부터 2절까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이 말씀의 요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왜 쓸데없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느냐? 그러지 말고 가치 있는 일을 하라, 이 말입니다. 쓸데없는 일이란, 배부르게도 못할 것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고, 가치 있는 일이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거지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던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온 성내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의논을 한 끝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경고했습니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사도행전 4:17).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한 말이 이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행전 4:19).

베드로와 요한은 올바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정황으로 볼 때, 사회의 지도층이 반대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는 일이 껄끄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리고 이것이 내가 불편한 일이냐, 편한 일이냐가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오직 그것으로 판단의 기준을 삼은 것입니다.

■ 1. 된장녀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 가운데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른바 ‘된장녀’라는 말인데, 저는 이 표현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된장’이라는 그 좋은 말을 사람을 비꼬는 데 사용하는 것이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우리 시대의 풍조를 잘 설명해주는 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된장녀란 이런 말이라고 합니다. 천 원짜리 싸구려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우고 나서는 이른바 ‘명품’ 커피 전문점에 우아하게 앉아서 만 원짜릴 커피를 마시면서 만족을 느끼는 여자…. 글쎄요, 여기서 또 여자가 공격의 목표가 되었습니다만, 남자라고 별다른 것은 없겠지요.

아까 이사야서 말씀에 그랬지요? ‘너희는 왜 배부르게도 못할 것을 위하여 애를 쓰느냐? 너희는 왜 양식도 아닌 것을 사면서 돈을 지불하느냐?’ 커피라는 게 기호품이니까, 그거 마신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이 된장녀가 만 원짜리 설렁탕을 사먹고 천 원짜리 커피를 마셨다면, 그건 그런대로 균형이 잡힌 소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거꾸로 되었다는 것이지요. 천 원짜리 김밥 한 줄로 한 끼를 때웠으니, 김밥의 실질 가치는 상당히 높습니다. 그런데, 배부르게도 하지 못하는 커피를 마시는 데 만 원을 쓴 것은 실질가치보다는 명목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결과입니다.

■ 2. 실질가치와 명목가치

우리 아이가 얼마 전에 휴대전화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휴대전화가 없으면 부모들이 더 답답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해 전화기를 하나 사야 하는데, 제 생각은 이겁니다. 요즘 만 원만 주면 새 전화기를 구입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써라. 그랬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창피하게 어떻게 그런 걸 들고 다니느냐, 차라리 안 쓰고 기다릴 테니 나중에 돈 생기거든 제대로 된 것을 사 달라, 이겁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한 번 구해보려고 매장에 나가봤습니다. 죽 둘러보다가 아이의 눈이 멈추는 기계가 있었는데, 직접 그걸 사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얼마냐 물어봤지요. 놀랍게도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기계들은 최소한 50만 원에서 70만 원짜리였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봤지요. 만 원짜리하고 70만 원짜리하고 기능이 다른 것이 뭐냐, 그랬더니 특별한 것은 없답니다. 통화 기능, 메시지 송수신 기능, MP3 기능 등, 만 원에 주는 것에도 웬만한 기능은 다 들어 있다는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로 그게 원래 만 원짜리는 아니고 판촉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기능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비싼 것이냐, 그랬더니 디자인이 신형이고, 연예인 아무개가 선전하는 것이라 좋다는 거예요.

전화기의 기본 기능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은 실질가치입니다. 거기다가 디자인이 좋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만하다, 이런 것은 명목가치입니다. 제가 아이를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소비풍조가 실질가치보다는 명목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명목가치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오늘의 문제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그랬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아파트 값도 그렇습니다. 강남에서 웬만한 아파트는 10억 원쯤 한답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아파트라면 우리 구미에서는 1~2억 정도면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구미에 사는 것과 강남에 사는 것이 삶의 질에 있어서 다섯 배, 열 배 정도의 차이가 나는가,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지요. 구미의 아파트는 실질가치가 높은 것이고, 강남의 아파트는 명목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실질가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지만, 명목가치는 시대에 따라서 크게 요동을 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거품’이라는 것이지요. 이건 그냥 제 말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갔던,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 이미 다 겪은 일입니다.

■ 3. 그리스도인의 가치 판단

그런 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그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 그것이 실질가치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 어떤 율법학자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가복음서 12:29-31).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성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때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네 몸과 같이’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거예요. 양반 상놈 나누지 말라는 것이고, 돈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나누지 말라는 것이고, 많이 배운 사람 무식한 사람 나누지 말라는 것이고, 장애인 비장애인 나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켜준 다음에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함께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했잖아요?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거지를 자기들과 동격으로 인정한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한 ‘예수의 이름’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실질가치입니다. 교회의 제도가 어떻고 교직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모두 이 실질가치를 위한 명목가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양반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말렸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교회에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 그것을 살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만족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것인가, 여기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일까, 여기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 맺는 말씀

된장녀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생각은 좀 하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자기의 가치판단에 따라서 된장녀가 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남이 하니까 무작정 된장녀 노릇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 원짜리 휴대전화기보다 70만 원짜리 신형 기계를 더 좋아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자기가 판단해서 70배의 돈을 더 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남보다 좀 더 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올리는 일,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 봉사하는 일, 선교하는 일, 서로 사귀는 일, 교회 자체를 운영하는 일…. 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그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내 몸과 똑 같이 생각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이것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을 앞두고, 생각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판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43 복 받는 이의 생활방식(1)―그릇을 비워라!
242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241 우상을 쓸어내고 주님의 몸을 세우자
240 넉넉하게, 넉넉하게!
239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238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37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236 아기야, 칼이 되어라!
235 큰 기쁨이 넘치는 도시
234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평화
233 모욕당할 수 있는 자격
»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231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
230 호감을 사려면
229 밥상, 아 그 거룩함이여!
2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227 나 기꺼이 밀알이 되리라
226 "결혼이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225 자유, 진리, 개혁
224 염치(廉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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