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전대환 채널 바로가기

성서본문 사도행전 5:33-42 
설교일 2006-12-17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대림절 


■ 성서 본문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율법 교사로서,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 의회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에, 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하십시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소.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그 뒤에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5:33-42)


■ 들어가는 말씀

지난주에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이런 대사가 나옵디다. “슬픔은 예인에게 가락이 되고 시가 된다.” 보통 사람에게는 슬픔이 그냥 슬픔이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음악의 재료가 되고, 시의 재료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슬픔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아픔이 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픔이 그냥 아픔이 아니라 더 큰 기쁨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됩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말이 원래는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 하는 말에서 변형되어 나온 말이기는 합니다만, 의술이든 예술이든 인생을 더 의미 있게 해준다는 뜻에서 둘 다 옳은 말입니다. 어쨌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말은 인생을 그대로 두면 짧고 허무한 것이지만, 예술로 승화시키면 인생의 길이도 길어지고 맛도 달라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다가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리고 신앙은 영원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예술이 없으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음악이 없고, 춤이 없고, 문학이 없고, 미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예술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인생의 윤활유입니다. 예술은 슬픔도, 아픔도, 서러움도 감동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술보다 한 차원 높게 인생의 아픔을 녹여서 기쁨으로 만들어냅니다. 예술은, 우리의 아픔을 달래줄 수는 있지만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생의 아픔을 달래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줍니다.

■ 1. 모욕당한 사도들

예술이라는 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맛을 제대로 알면 놓지 못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맛을 알기 전에는 재미가 없습니다.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맛을 제대로 알면 놓지 못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모욕을 당해도 기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기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 보니까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사도행전 5:41)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이 공의회에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의아한 것은 그들의 죄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서 의논을 해봤지만, 기분 나빠서 잡아오기는 했는데 그들을 잡아놓을 명분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사도들을 몇 대 때리고는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도들의 편에서 본다면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죄 없이 맞은 것도 모욕이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예수에 대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모욕당한 일에 대해 속상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아하, 이제 우리도 모욕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구나!’ 하며 더욱 자신감에 찼습니다.

■ 2. 예수님의 가르침

모욕도 아무나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야 당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고난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욕당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복음서 5:11-12).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 이전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님 때문에 직접적인 모욕이나 박해를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은 이미 옛날부터 있던 율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만 해석을 엉뚱하게 해서 율법의 본래 뜻을 훼손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확실하게 해석해주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이전의 예언자들도 박해를 받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방식으로 가르치고 행동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편의상 ‘예수 스타일의 삶’이라고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 3. ‘예수 스타일의 삶’

‘예수 스타일의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박해와 모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것을 확실하게 챙기고 싶은데,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지요, ▶내가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내가 남들보다 더 잘난 맛에 사는데, 모든 사람을 똑 같이, ‘네 몸과 같이’ 여기고, 오히려 남을 대접하라고 하지요, ▶앉아도 돈, 서도 돈, 집에서도 돈, 밖에서도 돈, 어디를 가나 돈이 판을 치는 세상인데, 당신 제자가 되라면 그 아까운 돈을 다 버리라고 하지요, ▶예수 믿어서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데, 그따위 생각 다 집어치우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지요, ▶부자 되는 게 복인 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요, ▶예수님보다는 가족과 친척, 친지,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그런 눈치 보지 말고, 그런 인간관계 다 팽개치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를 따르라 하지요….

예수 스타일로 살다가는 어디 가서 바보 소리 듣기 딱 좋은 것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기 외아들을 버려가면서까지, 그를 죽게 내버려 두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농담하시자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덕이 되고, 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남들보다 부유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세상에서 씨도 안 먹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 하면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 맺는 말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봅시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복음서 5:11-12). 여기서 “하늘에서 받을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셨지요. 물론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큰 복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그겁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은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 상상을 못합니다. 그게 한계에요.

예수님도 그랬고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 때문에 고난을 기쁘게 견딘 것만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고난 자체를 기뻐했습니다. 예수 스타일로 산 사도들이, 살아서 우리가 생각하는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바울이 예수 잘 믿어서 부자 됐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양반은 한평생 고생하다가 말년에는 감금된 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았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이 양반들은 거의 다 예수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은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세상을 살았습니다.

‘예수 스타일’로 살면서 고난당하고 모욕당하고, 바보 취급당하고, 고집 세다는 소리 듣는 것, 그 자체가 복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축복’을 말하지요. 예수님 덕에 더 편안하게, 더 부유하게, 더 권세 있게, 더 폼 나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두 글자로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꿈 깨!”

지금은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성탄을 준비하는 기간이지요. 이 기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귀한 예수님의 생신선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을 빙자해서 떡고물을 얻어먹기보다는, ‘예수 스타일’로 우리 삶을 고침으로써, 가장 예수님을 사랑하는 복된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43 복 받는 이의 생활방식(1)―그릇을 비워라!
242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241 우상을 쓸어내고 주님의 몸을 세우자
240 넉넉하게, 넉넉하게!
239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238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37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236 아기야, 칼이 되어라!
235 큰 기쁨이 넘치는 도시
234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평화
» 모욕당할 수 있는 자격
232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231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
230 호감을 사려면
229 밥상, 아 그 거룩함이여!
2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227 나 기꺼이 밀알이 되리라
226 "결혼이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225 자유, 진리, 개혁
224 염치(廉恥)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