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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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11-05-22 14: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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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로마서 8:5-6 
설교일 2011-05-22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로마서 8:5-6>


■ 들어가는 이야기

오월도 어느덧 하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계절의 5월이라고 하는 이 좋은 계절이 가기 전에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로운 일, 기뻐할 일, 감사한 일들이 많이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생명’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서에 보니까,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육신과 영을 이분법으로 나눠서 설명을 했는데, 육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분법에 익숙해져 있는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육체는 나쁜 것, 영은 좋은 것, 하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생명이면 생명이지, 여기다가 왜 평화가 덧붙여졌을까요? 그것은 평화를 유지할 때 생명의 순수성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생명의 무게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산길을 가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품에 안기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매 한 마리가 쫓아와서 말합니다. “그 비둘기는 내 밥이니 내놓으시오.” 왕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매가 다시 말합니다.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서 왜 저에게는 베풀지 않습니까?” 하는 수 없이 왕은 비둘기 대신 자기 살을 떼어주기로 했습니다. 비둘기만큼의 살을 주기 위해 허벅지 살을 떼어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한 쪽에는 비둘기를 얹었습니다. 비둘기가 더 무거웠습니다. 이번에는 한 팔과 한 다리를 올려놓았습니다. 역시 비둘기 쪽이 더 무거웠습니다. 생각다 못한 왕은 자기 온 몸을 저울에 올려놓았습니다. 비로소 무게가 같아졌습니다. 매는 왕의 행동에 감동해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하늘 높이 날아갔습니다. ― 법정, ≪참 맑은 이야기≫(동쪽나라, 2002), 56-60쪽, 「비둘기 대신 목숨을 바친 왕」 요약.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 무게가 같다는 것입니다. 임금의 생명과 비둘기의 생명이 그 무게가 다르지 않고, 그 값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동물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의 생명도 다르게 취급됩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들 가운데서 최고라고 하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다루는 것만 보더라도, 자살한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 비중이 매우 크게 차이가 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망할 경우에도 사람에 따라서 그 배상액이 다릅니다. 사람도 이렇게 차별하는 판국에 동물들에 대한 목숨이야 더 말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 어떤 것이든 생명은 소중하다!

저도 동물을 기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동물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동물들의 생명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데는 깊이 공감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온갖 동식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도 그 생명의 가치에 차등을 두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 유명한 안식일 계명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20:10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을 때도, 그 배에 사람뿐만 아니라 각종 동물들을 최소한 한 쌍씩 다 태우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중국의 정판교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일평생 새를 새장에 가두고 키우는 일을 싫어했네. 사람이야 즐겁지만 새의 입장에서 보면 감옥에 갇힌 꼴이기 때문일세. 새의 본성을 억압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도록 만들면서 어떻게 인정과 이치를 논할 수 있겠는가? 많은 아이들이 잠자리와 게를 실로 묶어 가지고 놀지 않는가. 잠시 후에는 잠자리와 게의 몸이 끊어져 죽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네. 천지(天地)는 쉬지 않고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데 사람이 어찌 함부로 그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잠자리와 게 등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지만 천지는 그들에게 귀한 생명을 부여했다네. 멀리 쫓아내고, 피하면서 서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게 현명한 처사하고 생각하네.” ― 정판교가 동생에게 보낸 두 번째 글에서. 사마광 외(장연 외 역), ≪아버지의 말 한 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바꾼다≫(명진출판(주),

■ 생명을 학대하는 사람들

최근에는 아이들이, 다른 장난감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동물을 가지고 놀면서 그것들을 학대하는 일이 드뭅니다만, 우리 어릴 때만 하더라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동물들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굳이 금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먹을 때 먹더라도 동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소 키우는 것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소는 원래 풀을 먹고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고기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육골사료를 먹여서 키우지요. 이것은 창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육골사료를 먹고 성장호르몬을 주기적으로 투여 받은 젖소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뚱보가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해 관절염에 걸리거나 골절이 되는 것들이 많다고 하지요. 운동은 안 시키고 살만 찌우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본디 젖소는 생후 3년생부터 임신을 하고 그때부터 10년 동안 우유를 짜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최근 ‘개발한’ 젖소는 1년생부터 우유를 생산하게 해서 3년 이내에 도태시킨다고 합니다. 생명의 법칙을 어겨서 더 많은 우유와 고기를 생산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에는 광우병이라는 치명적인 재앙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광우병이야 겉으로 드러났지만, 조기에 속성으로 성장시켜 일찍 도축하는 소와 돼지와 닭 등, 그런 것들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재배되고 있고, 유전자를 조작한 콩도 널리 유통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그것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 김용민, 〈문학에서의 자연환경과 생명〉, 이양호 편, ≪신학논단 제 37집≫(연세대학교 신과대학, 2004), 69-70쪽. 유명한 소설 ≪토지≫를 쓰신 박경리 선생은, 이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땅에서 비닐을 걷어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닐은 ‘철없는 식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무모한 시도라는 것입니다. ― 전희식,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 먹다≫(도서출판 역사넷, 2003), 124쪽. 이런 게 다 생명을 조작하는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을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 맺는 이야기

성철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명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 정찬주, ≪자기를 속이지 말라≫(열림원, 2005), 219-220쪽. 절집 대웅전에 만들어놓은 불상, 그것이 부처가 아닙니다. 그건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하나의 형상일 뿐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진짜 부처입니다. 발밑에 기는 벌레,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새, 그리고 온 천지에 두루두루 퍼져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 나아가서 풀 한 포기, 돌멩이 한 개가 다 부처입니다.

굳이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까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에서도 생명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서 10:29).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 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분만 아니라 모든 것의 생명이 같습니다. 로마서 8:6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성령의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을 존중함으로써 우리의 생명도 존중 받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24 오르바와 룻
223 예수님의 할머니
222 사람의 생각, 성령의 생각
» 생명의 무게
220 굶주림입니까? 칼입니까?
219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218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217 그리스도의 사람
216 낡은 정신, 새 정신
215 낡은 정신과 새 정신
214 늑대에게 먹이 주기
213 나를 건져주소서!
212 레미제라블
211 낡은 정신, 새 정신
210 ‘꽝’ 없는 희망
209 하나에 대하여
208 '하나'에 대하여
207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206 희망 있는 사람이란?
205 잊지 말아요, 우리의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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