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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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13-02-03 14: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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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누가복음서 12:49-53 
설교일 2013-02-03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서 12:49-53>


■ 들어가는 이야기

아직 쌀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난 1월에 겪었던 혹독한 추위를 생각하면 지금은 견디기가 쉽습니다. 내일이 입춘(立春)이지요. 봄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새봄을 앞두고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함께 모인 여러분 모두 위에, 하늘의 충만한 은혜와 땅의 큰 축복이 언제나 함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 이야기를 잠시 해보려고 합니다.

■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연상됩니까? 흰 옷을 입은 깨끗한 모습이 떠오릅니까? 우리가 달라는 대로 복을 주시는 분으로 기억하십니까? 그 옆에만 가도 평화가 철철 흘러넘치는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때때로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저도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서 12장 말씀도 그렇습니다. 49절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시다니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서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복음서 10:34). 아니, 예수님이라면 세상에 평화를 주셔도 시원치 않을 판에 칼을 주러 오셨다니요? 이거,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누가복음서 12:51-53의 내용을 다시 봅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식구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화해를 해야 하는데, 다섯 식구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딸과 어머니가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맞서게 될 것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 하나님의 아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에 불을 지르셨는지 살펴봅시다. 요즘 대통령이 바뀌는 때라 국회에서 청문회를 자주 합니다. ‘청문회 시즌’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앞으로도 많이 하게 될 겁니다. 청문회를 하면 늘 나오는 단골메뉴들이 있지요. 위장전입, 세금탈루, 부동산투기, 불법증여 등등, 고위공직 후보자들에게는 어찌 그리 한 결 같이 그런 일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민감한 게 본인과 아들의 군대 문제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우스갯소리가 있지요. 군대 면제 받으면 신의 아들, 보충역으로 빠지면 사람의 아들, 현역병으로 가면 어둠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대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시던 그 시대에 누가 나서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면 큰일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임금만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시민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오!’ 하면 그것은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네가 감히 왕을 지칭해?’ 하면서 역적으로 다스렸습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삼족을 멸하네, 구족을 멸하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라는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대는 것입니다. 밉다니까 업자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보고 감히 ‘아빠’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당신들도 나와 똑 같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지요. 이렇게 말하면, ‘그게 뭐 어때서?’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기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제사장들이나 하는 것이고, 양반들이나 하는 것이지, 어디 상것들이 함부로 기도를 합니까? 성경에 평민이 기도하는 장면도 가끔은 나오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대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입만 달싹거리면서 눈물만 흘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무나 기도해도 된다 하시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첫 문장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양반들이나 귀족 또는 왕족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입니다. 이건 혁명입니다.

■ 불을 지르고 나서

성경에 보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자들이 보기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지요. ‘어디서 상것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해? 그것도 지엄하신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버지라고 해?’ 이러면서 예수를 잡으러 다닌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보안법’에 걸어서 사형을 시키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국가반란죄로 처형당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하셨는데, 이쯤 되면 불을 질러도 엄청난 불을 지른 것입니다. 세상이 뒤집어졌지요. 예수님께서 3년여 활동하시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로마 당국도 초비상이었습니다. 어디서 저런 도깨비 같은 게 나타나서 세상을 소란케 하느냐면서, 매일 같이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저거, 잡아야 되는데…, 저거 그냥 두면 안 되는데…, 잡아서 죽여야 하는데…’ 하면서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로마 당국도 예수님을 함부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눈의 가시로 여기고 있던 이스라엘 양반들도 감히 예수를 잡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민란’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까봐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불을 지르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투사로 생각했습니다. 혁명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옹립해서 왕으로 세우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치열하게 싸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적인 왕이 되실 생각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투사가 이래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뺨을 한 대 때렸는데, 상대가 화를 내기는커녕 다른 쪽 뺨을 돌려댄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황당합니까? 때리던 놈이 겁이 덜컥 나지 않겠습니까? 그게, 한 사람이 그렇게 하더라도 기가 찰 노릇인데,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러고 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십 명이 아니라 서너 명이 그런다고 하더라도 때리는 사람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이거 뭔가 잘못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 맺는 이야기

이것이 예수님의 투쟁 방법입니다. 때리면 맞아주라는 것입니다. 빼앗으면 빼앗겨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맞고 그냥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술 더 뜨라는 것이 예수님만의 독특한 싸움법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누가 이런 말을 합디다. “혼자 저항하면 뭇매를 맞지만, 같이 저항하면 잔매를 맞고, 모두 저항하면 때리던 사람이 몰매를 맞는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면 맞는 게 습관이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지르셨습니다. 어설프게 그런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 이후의 대응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비폭력 저항’입니다. 뺨을 치면 맞아주고 강탈하면 강탈당해 주되, 그냥 당하지 말고 오히려 뺨을 한 대 더 치게 해주고, 강탈하려던 것에다가 다른 것까지 끼워서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상대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그렇게 하면 상대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수십, 수백 명이 그렇게 하면 효과는 상상 밖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복음서 18:19).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두세 사람이 뜻을 같이 하면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기 전에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라는 것, 비록 삶이 고생스럽고 힘들더라도 우리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세상에 오셨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붙이신 그 불은 지금도 활활 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이신 불,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이지요. 이게 불씨가 돼서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피 터지게 싸웁니다. 이 문제 때문에 집안사람들끼리도 다툽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우리도 그 싸움의 대열에 함께 서야 합니다. 다만 폭력으로 할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뜻을 모아서 맞서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똑 같이 존중 받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1023 "내 친구인 너희에게!"
1022 "그분을 두려워하십시오!"
1021 “불을 지르러 왔다!”
» "불을 지르러 왔다!"
1019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1018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다!"
1017 예수님의 시사논평
1016 은혜 베풀기, 은혜 갚기
1015 추수감사절의 두 남자
1014 보편대우, 선별대우, 특별대우
1013 2020.3.1 온라인예배 실황 영상
1012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들
1011 자리 잡기
1010 엄마 집
1009 “일출봉에 해 뜨거든”
1008 아버지가 되면 알게 되는 것
1007 두 아들과 아버지
1006 양을 찾아서
1005 “하나님을 만들어 주십시오!”
1004 저승에 간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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