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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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시편 49:16-20 
설교일 2014-08-17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기념주일 


[오디오파일 듣기/내려받기]

■ 성서 본문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
그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그의 재산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비록 사람이 이 세상에서 흡족하게 살고
성공하여 칭송을 받는다 하여도,
그도 마침내 자기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시편 49:16-20>


■ 들어가는 이야기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기념주일입니다. 1990년 8월 19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으니까 벌써 만 24년이 되었습니다. 창립 당시부터 함께 하셨던 분들도 계시고, 그 뒤에 합류한 분들도 계십니다만, 주님께서 세우신 우리교회에 몸을 담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힘쓰시는 여러분 모두 위에 성령님의 격려와 축하가 크고 세차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인생은 나그네 길

시편 19:16에 보면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창립기념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 다른 교회가 큰 교회가 되더라도, 그 교회의 교인이 늘어나더라도, 너희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마라! 한 남자가 도량이 깊기로 소문난 수도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수도승의 방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습니다. 오직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수도승에게 인사를 한 후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가구는 전부 어디에 있습니까?” 수도승이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의 가구도 여기에 없지 않소?”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저야 이곳에 잠시 다니러 온 나그네가 아닙니까.” 수도승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 잠시 다니러 온 나그네라오.” ― 한상현, ≪현자들의 철학 우화≫(이가출판사, 2001), 85쪽. 여행을 많이 다녀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여행차림은 단순한 게 좋습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여행은 그래도 상당히 편리해졌습니다만, 그래도 짐 가방은 작고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저는 어디 멀리 출타할 때 다른 짐은 가급적 줄이지만, 휴대전화기는 확실히 챙깁니다. 배터리 두 개를 항상 100%로 채워서 떠납니다. 집 떠나면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어딘가에 고립되어 있을 수도 있고, 긴급히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할 일도 있을 테니까요. 인생길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물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락할 방법은 언제나 확보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 행복에 이르는 방법

야고보서 4: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고, 연극배우처럼 무대에 등장했다가 자기 배역이 끝나면 두말없이 내려가야 하는 게 인생이고, 볼일이 있어서 잠깐 갔다가 업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듯이 언젠가 본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짧은 인생길이지만, 우리가 지구별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법상이란 스님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욕망을 이루었을 때 오는 행복이고, 둘째는 욕망 그 자체를 비워버렸을 때 오는 행복입니다. 첫 번째 행복은 욕망의 성취와 좌절에 따라 행복과 불행으로 나뉘는 상대적인 행복이지만, 두 번째 행복은 성취와 좌절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이 없는 그저 있는 그대로 중심 잡힌 당당한 행복입니다. 전자의 행복은 끊임없이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고 잠깐 동안만의 들뜬 행복감만을 가져다주며, 유한하기에 헛헛하지만, 후자의 행복은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평화로운 무한하고 고요한 행복입니다.” ― 법상, ≪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천천히 걸어라≫(도서출판 무한, 2003), 10쪽. 행복을 위해서 무언가를 자꾸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하고 행복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비우고 사는 사람은 소유물이 없어도 행복하고 있어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잠언의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잠언 23:4).

■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내 마음’만 비우자, 당신들이야 재물 때문에 싸우든 말든, 고민을 하든 말든, 나만 평안하면 그만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누가복음서 6:20). 이 말씀의 뜻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혼재해서 살고 있을 때,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가난한 쪽이 복이 있다, 이런 말씀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너무 야속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선행이 되어버립니다. 배고픈 아이 둘이 있는데 한 아이에게는 빵을 세 개를 주고, 한 아이에게는 반쪽을 주면서 “얘야, 네가 더 복이 있어!”라고 말한다면 그 아이가 동의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뱅이의 둘 가운데 가난뱅이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 모두 청빈하게 사는 것이 복이 있는 세상이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오신 교황께서 엊그제 미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어제 광화문 미사에서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부익부빈익빈을 부추기는 현대의 자본주의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 맺는 이야기

제가 부자 이야기를 할 때 오해는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직종에 따라 연봉 차이가 나는 게 현실이지요. 그래도 몸을 움직여서 노동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부자가 아닙니다. 노동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돈이 돈을 벌어오는 것을 일 년에 수억, 수십억, 그 이상씩 받아 챙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 남들이 부자로 산다고 스스로 초라해지지 마십시오. 또한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스스로 초라해지지 마십시오. 마태복음서 19:24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향평준화’입니다. 그래야 지구가 살고 사람이 삽니다. 이런 의식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아무쪼록 저나 여러분이나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고, 자신감에 충만해서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2014.8.17 구미 한울교회 주일예배 말씀입니다.)
941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들
940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939 편안한 후회
938 영원토록 칭찬 받기
937 빛이신 하나님
936 으뜸 친구
935 교회가 바로 서려면
934 시온의 딸과 임금님
933 “그만하면 됐다!”
932 저승에 간 부자
931 어느 쪽이 이길까?
930 먹보들의 기도
929 복의 생산과 유통과정
928 엄마 집
927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926 “평화가 있어라!”
925 주일에 해야 할 일 세 가지
924 전쟁 연습, 평화 연습
923 총명한 사람의 선택
922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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