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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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9-10-25 15: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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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로마서 7:5-6 
설교일 2009-10-25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기념주일 


■ 성서 본문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로마서 7:5-6>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은 종교개혁 492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10월 31일의 앞 주일을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회)와 우리 개신교가 한 식구였습니다. 그러다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붙임으로써 딴 살림을 차리게 됐지요.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 개신교회의 새로운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사실 좀 뒤늦은 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르네상스 운동’이 한바탕 세상을 휘젓고 지나간 뒤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은 문학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음악이나 미술 등 각 분야에서 세상을 뒤집는 운동이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뒤집어졌는데, 교회는 그때까지 그대로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로마서에서 바울도 그랬습니다. 로마서 7:6입니다.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낡은 정신’과 ‘새 정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낡은 정신이란 무엇이고, 새 정신이란 무엇인가, 방금 읽어드린 말씀처럼, 문자에 얽매인 것은 ‘낡은 정신’입니다. 반면에 성령이 주시는 것은 ‘새 정신’입니다.

■ 안식일 이야기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과 부딪친 일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주제가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안식일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출애굽기 20:8-11).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길을 가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더니 ‘딱 걸렸다!’ 하며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안식일에 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째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먹느냐, 그러니까 왜 안식일에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하셨습니다.

법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문자로 보면 법을 어긴 것 맞습니다. 그러나 안식일법의 정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과 동물들과 논밭에 복을 주시는 날입니다. 일하지 말라는 것도 그래요. 원래 이 법은 노동자들을 위해서 생긴 겁니다. 요즘이야 주 5일제다 뭐다 해서 웬만한 직장에서는 주말에 반드시 쉬지요. 쉬지 않고 일을 하면 수당이라도 받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종들은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것입니다. 주인만 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쉬게 해주라는 겁니다. 가축뿐만이 아니에요. 땅도 쉬게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쉬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유대 양반들은 안식일 문제를, 낡은 정신을 가지고 문자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정신을 가지고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사실 새롭게 해석한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 법이 만들어질 때의 법 정신을 살려낸 것입니다.

■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 이야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이야기 잘 아시지요(요한복음서 8:1-11). 예수님께서 새벽에 산에 가셨다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고,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떤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 여자를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말하기를(레위기 20:10; 신명기 22:22-24),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러면 예수님이 아니지요. 만일 그렇게 말했다가는 ‘용서하시는 예수님, 사랑의 예수님’이라는 이미지가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놓아주라고 하면 현행법이 되는 겁니다.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말을 했으니, 예수님까지 잡아다가 죽이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어떤 사본들에 보면 그 여자를 끌고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죄목을 적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도 날마다 죄를 짓고 살면서 불쌍한 여자 하나를 데려와서 죽이겠다고 하니, 참 같잖은 일이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뻔뻔하게도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도대체 어쩔 거냐? 빨리 답을 해라’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한참을 그러고 계시다가 드디어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즘 말로 완전 대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슬금슬금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셔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 ‘법대로!’

이 이야기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법대로!’를 외친 겁니다. 그런데 ‘법대로!’를 강조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법이 만능이 아니거든요. 법이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법 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히면 돌로 쳐 죽여라’ 하는 법은, 돌로 쳐 죽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음을 하지 않고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법이라는 것이 범죄를 막아줄 거라고 보통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입니다. 지금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이 법이 없어서 일어납니까? 아니지요. 법 때문에 나쁜 짓을 못하게 된 사람은 법만 피할 수 있다면,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 잘못된 일을 계속할 겁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돌아서서, ‘아,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 생각하는 사람은 법이 없어도 잘못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법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법을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태복음서 5:18).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겠습니까? 법을 무시하거나 법을 가볍게 여기자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낡은 정신으로 법을 해석하지 말고, 새 정신으로 법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간음이라는 것이 없어지느냐, 이겁니다.

요즘 사형제 폐지 논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그 문제도 그렇습니다. 흉악범을 사형시키면 흉악범죄가 줄어드는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들에서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벌써 오래 전부터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서 거의 사형제 폐지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만, 사형을 집행할 때보다 흉악범죄가 늘어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사형시킨 사람들 가운데는 흉악범보다 이른바 시국사범 또는 양심수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제도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고 사람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옛날의 낡은 정신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새 정신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낡은 정신은 율법의 정신이고, 새 정신은 복음의 정신입니다. 낡은 정신은 경직된 정신이고 새 정신은 유연한 정신입니다. 낡은 정신은 문자나 법 자체를 강조하지만, 새 정신은 법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우리 다 같이 낡은 정신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222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221 성령의 열매(2) - 기쁨
220 입춘대길(立春大吉)
219 야곱, 부자 되다!
218 "내 친구인 너희에게!"
217 새 영, 새 계명, 새 삶
216 지금 이 나라에서는
215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14 지혜롭게 판단하기
213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212 사랑의 빚
211 성령의 열매(1) - 사랑
210 "와서 아침을 먹어라!"
209 성령의 열매(4) - 인내
» 낡은 정신과 새 정신
207 세 가지 교훈
206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205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지 마라!
204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203 아름답게 부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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