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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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9-07-12 13: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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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갈라디아서 5:22-26 
설교일 2009-07-12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오순절 
■ 성서 본문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

<갈라디아서 5:22-26>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서 ‘선함’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읽는 새번역 성경에는 ‘선함’으로 되어 있지만, 개역 성경에는 ‘양선’(良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질고 착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선행’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 비슷한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선함’의 열매를 맺어서 선하게, 곧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선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세 가지 정도의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일관성

선하다는 것은 첫째, 일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마가복음서 10:18).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이 선한 분이겠습니까? 예레미야서 33:11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 감사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선하시며, 진실로 그의 인자하심 영원히 변함이 없다.”

주님이 왜 선하신가 하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일관성이지요. 시편에도 여러 차례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 먼 옛날부터 변함 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기억하여 주십시오”(시편 25:6).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시편 36:10).

요즘에는 별로 안 쓰는 말입니다만, 옛날에는 ‘갈보’라는 말을 가끔씩 썼습니다.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욕할 때 부르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여자를 왜 ‘갈보’라고 하는가, 박갑천 선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갈’ 자는 간다는 말입니다. 갈아치운다, 곧 ‘change’한다는 것이지요. 거기에다가 뚱보, 털보, 울보…, 할 때의 그 뒷가지 ‘-보’를 붙여서 ‘갈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내를 이 사람 저 사람 자주 바꾸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울보는 울기를 잘하고, 갈보는 갈기(바꾸기)를 잘한다, 그래서 갈보가 된 겁니다. ― 박갑천, 《재미있는 어원 이야기》(을유문화사, 1995), 20-21쪽.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을 참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당신께서 일관성이 있는 분,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관성이 없으면 아무리 제사를 잘 드려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한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호세아서 6:6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변함없는 사랑, 곧 일관성 있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 자연스러움

선하다고 하는 것은, 두 번째로, 자연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연발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참 보기 좋다’는 것이지요. 자연스럽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가 여름 수련회 때 안동 하회마을에 갔었지요. 하회마을의 이름이 왜 하회(河回)인가 하면, 말 그대로 그 마을 옆의 강이 굽이쳐 돌아 흐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와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 선한 것인데, 자연스러움의 특징 중 하나는 표시가 안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배웠지요. 진정한 선행은 표시가 잘 안 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고대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선행을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이 당신의 선행으로 혜택을 받았다면, 어찌하여 당신은 바보처럼 선행에 대한 찬사나 그에 대한 보답을 받고자 하는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김철곤 역), 《아우렐리우스 명상록》(민중출판사, 2005), 166쪽.

예수님께서도, 선행을 할 때는 표시가 안 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서 6:3-4). 실제로 표시 안 나게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요. 우리가 ‘국민 여동생’이라고 부르는 한 연예인은, 지금까지 아무런 조건 없이 수십억 원을 썼답니다.

표시 안 나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생활 자체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남모르게 선행을 하라고 하셨지만, 선행이란 것은 감출수록 커지는 법입니다. 악행도 감출수록 커집니다. 그 반대로, 선행은 들출수록 작아지고, 악행도 들출수록 작아집니다. ― 서정인, 《모구실》((주)현대문학, 2005), 252쪽.

■ 아름다움

선한 것이 무엇인가, 그 세 번째 뜻은 ‘아름다움’입니다. 한자로 착할 ‘선’(善) 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아시지요? 아름다울 ‘미’(美) 자와 비슷합니다. 착할 ‘선’ 자는 양 ‘양’(羊) 자 밑에 제단이 그려져 있고, 아름다울 ‘미’ 자는 양 ‘양’(羊) 자 밑에 큰 ‘대’(大) 자가 있습니다. 흔히, 아름다울 ‘미’ 자를 해석하면서 ‘양이 크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물론 양이 살지고 크면 좋기는 좋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는 ‘선’ 자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더 분명하게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큰 ‘대’ 자는 덩치가 크다는 뜻도 있지만, 원래는 ‘어른’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양을 잡아서 어른에게 대접해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서 아름다울 ‘미’ 자가 된 것입니다. 착할 ‘선’ 자도 비슷한 뜻인데, 이 글자는 양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모습입니다. 양을 잡아서 어른께 대접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 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하지요. 그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양이 예쁜 것도 아름다운 것인 것은 맞습니다. 불교에 ‘보시’(普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널리 베푼다’는 뜻이지요. 흔히 무엇을 베푼다, 하면 물질을 베푸는 일을 생각하지만,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베풀 것은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친절도 보시이고,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보시이고, 남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도 보시이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는 것도 훌륭한 보시입니다.

히로 사치야라는 일본사람은, 여성들이 화장하는 것도 훌륭한 보시라고 말합니다. 물론 덕지덕지 분가루로 얼굴을 덮어씌우는 것을 두고 보시 화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보시라면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하는 화장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그래서는 보시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너저분한 모습을 하고 있고 외출할 때만 화장하는 여성들도 보시 안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족에게 깔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족에 대한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 히로 사치야(김혜경 역), 《케이크와 부처》(불일출판사, 1999), 38-39쪽.

이처럼 모양만 예쁘게 만드는 것은 자기만족이지만, 똑 같은 화장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은 선행이고 보시입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정말 아름다운 것은 어른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조금 불만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큰 교회에 가면 대현 스크린을 설치해둔 데가 많지요. 설교할 때 목사의 얼굴을 크게 비추어 줍니다. 물론 멀리 뒤쪽에 앉은 사람들이 목사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겠습니다만, 원칙으로 볼 때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정장복 교수의 말입니다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목사 얼굴을 그렇게 크게 비추어주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작아지지 않겠느냐는 지적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 맺는 말씀

신명기 33:16에서 모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땅에 복을 베푸시니, 그 땅이 온갖 좋은 산물로 가득할 것이다.” 요셉 지파를 두고 축복한 말씀인데, 하나님이 왜 선하신 분인가 하면 땅에 복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선한 사람이 되려면 복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일관성이 있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 둘째는 자연스러운 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일관성 있게,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선을 베푸는 주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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