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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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7-04-01 1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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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22:12-14 
설교일 2007-04-01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사순절 


■ 성서 본문

그 날에,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통곡하고 슬피 울라고 하셨다.
머리털을 밀고,
상복을 몸에 두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하였느냐?
너희는 오히려 흥청망청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하였다.

그래서 만군의 주님께서
나의 귀에 대고 말씀하셨다.
“이 죄는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서 22:12-14)


■ 들어가는 말씀

전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1-4).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때를 역행하면 꼴이 우습게 됩니다. 웃어야 할 때 운다든지, 울어야 할 때 웃는다든지, 통곡해야 할 때 기뻐 춤을 춘다든지, 기뻐 춤을 춰야 할 때 통곡을 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사람이 우리 옆에 있다면 그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오늘 구약성경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시기를, 통곡하고 슬피 울라고 하셨습니다. 머리털을 밀고, 상복을 몸에 두르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흥청망청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하였습니다(13). 슬피 울며 통곡하고, 머리털을 밀고 상복을 입어야 할 때, 오히려 그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14). “이 죄는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마음에 깊이 새기는 주간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 한 주간 동안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한 주간은 우리가 흥청망청 먹고 마실 때가 아니라 절제할 때입니다. 기뻐 춤출 때가 아니라, 통곡할 때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즐길 때가 아니라 상복(喪服)을 입고 애통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 버릇없는 아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옛날이야기입니다. 옛날에 망나니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의 못된 행실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하루는 충격요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 앞에서 자기 종아리를 걷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얘야, 지금까지는 내가 네 종아리를 때렸지만, 그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너를 잘못 가르치고, 잘못 키웠으니, 오늘은 내가 맞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회초리를 들고 자기 종아리를 힘껏 내려쳤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나쁜 짓 안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현대의 어떤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자기도 이 방법을 한 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버릇이 없는 초등학생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얘야, 지금까지는 내가 네 종아리를 때렸지만, 그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너를 잘못 가르치고, 잘못 키웠으니, 오늘은 내가 맞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회초리를 들고 자기 다리를 힘껏 내려쳤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들은 엄마에게 뛰어가며 소리 쳤습니다. “엄마, 아빠 미쳤나봐!”


■ 고난당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었습니다. 허리가 창에 찔렸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짓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매 맞을 짓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사형을 당할 정도로 죽을죄를 지셨습니까? 아니지 요?

이거 다, 부모 같은 심정으로, 형님 같은 심정으로, 철없는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응,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지 않았습니까? 자기 앞에서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치는 아버지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철없는 아이와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는 철딱서니 없는 신자였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높은 분이에요.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치 못할 어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하고 찬송을 부른다고 해서 원래 우리 친구가 아니에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친구가 되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른의 크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래 친구였던 것처럼 맞먹으려고 합니다. 이건 철없는 짓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동격인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분이 낮아지셔서 우리 곁에 오신 것이지, 결코 우리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 인자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날 밤이었습니다. 엄청나게 괴로우셨을 것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우리는 그게 그냥 되는 일인 줄 알아요.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입니다. 굶으면 배고프고, 때리면 아프고, 찌르면 피가 나는 분이에요. 그걸 묵묵히 참으시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무슨 마력이라도 있어서, 그냥 참아지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어쨌든,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겟세마네’라고 하는 작은 산이었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러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좀 더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잠시 기도를 중단하시고 돌아와서 보니까,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제발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님은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와서 보니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졸려서 눈도 뜨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오셨을 때도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됐다. 그런데 어떻게 하니? 벌써 때가 왔구나. 얘들아,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 맺는 말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정도면 됐다” 하셨지요?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이란 사람이, 그것도 뽑혀온 최측근 제자란 작자들이 자고 있었는데, 되기는 뭐가 됐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만하면 넉넉하다” 하셨습니다. 얼마나 인자하신 분입니까? 제자들이 충분히 잘했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까지 좇아오기라도 했으니 그 정도면 됐다는 것이지요.

교회의 전통을 보면 사순절 기간에는 금식을 많이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해보겠다는 것이지요. 옳은 일입니다. 가능하면 지금도 해볼 일입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금식 안 했다고 뭐라고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안 하신다고, 마냥 뚜드리고 먹고 마시고 흥청거려도 될까, 그건 아닙니다. 철없는 짓이지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가 공식으로 금식을 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금요일 밤에 성금요일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이지요.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조상의 제삿날 제사 안 지내고 딴 짓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호래자식’이라고 합니다. 뿌리도 모르고 예절도 모르는, 인간 같지 않은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주님, 주님’ 하면서, 그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 코빼기도 안 보이고 까맣게 잊고 사는 사람들은 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을 장기판의 ‘졸’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냐, 오냐’ 잘 해주니까, 하늘같은 분과 맞먹으려고 드는 못된 신자입니다. 철없는 아이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협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금요일 예배 안 드렸다고 예수님께서 천국 문에 지키고 서 계시다가 지옥으로 보내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평소보다는 뭔가 ‘조금은’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잘 해주신다고 버릇없이 굴지 말고, 예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보내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에 우리가 ‘털끝만큼이라도’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이 한 주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피를 흘리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942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41 부활 후 가장 궁금했던 일
940 개켜 있는 수건
939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38 믿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937 그날, 주인공
936 게임의 결과
935 부활절 아침의 사람들
934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
933 [새벽] 홀로 가는 길
932 주님 계신 그 곳에
931 부활의 날, 좋은 날
930 주님의 이슬
929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928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927 주님의 나라로!
926 아름답게 부활하기
925 그래도 기뻐하십시오!
924 "와서 아침을 먹어라!"
923 부활 드라마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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