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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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스가랴서 9:9-12 
설교일 2009-04-05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사순절 


■ 성서 본문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 낼 것이다.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 주겠다.

<스가랴서 9:9-12>


■ 들어가는 말씀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던 날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일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예언자가 벅찬 가슴으로 예언합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스가랴서 9:9).

이제 왕께서 오시니, 고생은 끝이 났다고 선포합니다. 이제는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합니다. 해방이 되었다고 외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 주겠다.” 정말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차 양 옆에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었습니다. 길바닥에다가 겉옷을 벗어서 깔았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단히 큰 복음이었습니다. 이제야말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렇게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일은 꼬이고 말았습니다. 영광을 받으시기는커녕 온갖 고초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오늘은 그 일을 더듬어보겠습니다.

■ 배신

예수님께서는 배신(背信)을 당하셨습니다. 배신이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믿었던 사람들은 누굽니까? 제자 열두 명이었겠지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재정 담당이었습니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조직에서든 돈을 맡길 때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인데, 가장 믿었던 그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였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유다의 밀고로 예수님은 체포되었습니다.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큰일이 터졌을 때, 그 일에 대한 여론이 중요한데, 백성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양반들이야 처음부터 예수님을 미워했으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반 군중들까지 그렇게 매몰차게 배신을 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감탄했던 사람들, 배고플 때에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 말씀을 들을 때는 환호했었습니다. 밥을 얻어먹을 때는 감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서 쌍수를 들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렵게 되자, 그들 가운데 누구도 선뜻 나서서 궁지에 몰린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그 사람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이른바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마저 서슬 퍼런 관(官)의 공포 앞에서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는데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복음서 26:33)라고 맹세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35)라고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도 “나, 저 사람 정말 몰라요!” 하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제자들로부터, 그리고 가장 아끼는 측근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 굴욕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배신의 아픔을 겪으셨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이 ‘굴욕’이라는 것은 정말 눈으로 보지 못할 일입니다.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굴욕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 봅시다. 만일 여러분의 아버지가 결박된 채로 군중들 가운데 있다고 합시다. 군인들이 여러분의 아버지를 발로 차고 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보다 더 심하게 욕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예수님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려놓고 장난을 쳤습니다. 예수님의 따귀를 갈기고는 “누가 때렸게?” 외치고는 물러섭니다. 그 다음 사람이 예수님께 발길질을 하고는 “누가 찼는지 알아맞히면 용치!” 하면서 낄낄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굴욕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죄명을 알리는 푯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너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지? 어디 맛 좀 봐라!” 하는 뜻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서서 구경하는 가운데서, 지도자들은 마음껏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너,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며? 꼴값 떨고 있네. 남들은 관두고 너부터 한번 구원해 봐. 거기서 뛰어내려 와보라니까?” “너, 잘 났다며? 잘난 놈이 그런 것도 하나 못해?” 이런 식이었습니다.

■ 죽음

이와 같이 예수님은 참으로 엄청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배신당하는 일이야 세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당할 수 있다고 치자, 이겁니다. 그래도 배신 사건은 나중에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배신자가 망하거나 처단 당하는 일을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굴욕 당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입니다. 굴욕을 당했던 이유가 잘못이었음이 나중에라도 입증되면 ‘굴욕 사건’은 역사에 묻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문제가 다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최악의 사형법인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에 악형 가운데는 불에 태워 죽이는 것도 있었고, 끓는 기름에 던지는 것도 있었고, 굶주린 사자나 맹수의 먹잇감으로 내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십자가형을 최악의 사형 방법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은 ‘너는 죽어서도 흙에 묻히지 못한다’는 잔혹한 저주가 담겨 있는 처형 법이기 때문입니다. ― 윤인중+신정은, 《숲속에서 띄운 편지》(생명평화, 2008), 117쪽 참고.

어떤 사람이 극한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제발 살아만 다오!” 하는 부탁을 합니다. 처절한 부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매달립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면해서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회복을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난 것입니다. 실낱같던 희망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 맺는 말씀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 주간 동안 겪으신 사건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제자 가운데서 가장 믿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감히 예수님 곁에 접근도 제대로 못할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눈엣가시 같이 여기고 있던 귀족ㆍ양반들이 예수님에게 최악의 굴욕을 안겨드렸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인 죽음의 길에까지 떨어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스가랴서 9:9). 우리가 비록 험한 꼴들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비록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 왕으로 오시기를 기다려 왔기에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배신을 당하고, 굴욕을 당하고,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사순절부터 시작해서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하나님나라 식구들의 이야기입니다.
942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41 부활 후 가장 궁금했던 일
940 개켜 있는 수건
939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38 믿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937 그날, 주인공
936 게임의 결과
935 부활절 아침의 사람들
934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
933 [새벽] 홀로 가는 길
932 주님 계신 그 곳에
931 부활의 날, 좋은 날
930 주님의 이슬
929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928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927 주님의 나라로!
926 아름답게 부활하기
925 그래도 기뻐하십시오!
924 "와서 아침을 먹어라!"
923 부활 드라마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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