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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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고린도전서 15:54-58 
설교일 2009-04-12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부활절 


■ 성서 본문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58>


■ 들어가는 말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시체 하나가 벌떡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이지만, 저는 오늘, 지난 주일에 드렸던 것과 똑같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배신과, 굴욕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똑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부활이 있기 전에 하는 이야기와 부활 후에 하는 이야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 부활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이야기는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나서 나누는 그 이야기는 기쁨의 회상입니다. 두고두고 이야기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 배신

예수님께서는 배신(背信)을 당하셨습니다. 배신이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믿었던 사람들은 제자 열두 명이었습니다.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재정 담당이었습니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그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였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유다의 밀고로 예수님은 체포되었습니다.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백성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양반들이야 처음부터 예수님을 미워했으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반 군중들까지 그렇게 매몰차게 배신을 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감탄했던 사람들, 배고플 때에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는 환호했었습니다. 밥을 얻어먹을 때는 감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서 쌍수를 들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렵게 되자, 그들 가운데 누구도 선뜻 나서서 궁지에 몰린 예수님을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이른바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마저 서슬 퍼런 관(官)의 공포 앞에서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복음서 26:33)라고 맹세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35)라고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도 “나, 저 사람 정말 몰라요!” 하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제자들로부터, 그리고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측근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따라다니던 사람이, 막상 예루살렘에 들어와서는,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궁지에 몰린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고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는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다시 모였습니다. 다시 모인 그들은 충직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배신자들을 충성스러운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 굴욕

예수님께서는 배신의 아픔을 겪으셨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이 ‘굴욕’이라는 것은 정말 눈으로 보지 못할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박된 채로 군중들 가운데 있다고 합시다. 군인들이 그분을 발로 차고 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보다 더 심하게 욕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예수님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려놓고 장난을 쳤습니다. 예수님의 따귀를 갈기고는,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히어 보라고 외치고는 물러섭니다. 그 다음 사람이 예수님께 발길질을 하고는 누가 찼는지 알아맞히어 보라고 하면서 낄낄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굴욕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죄명을 알리는 푯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너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지? 어디 맛 좀 봐라!” 하는 뜻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서서 구경하는 가운데서, 지도자들은 마음껏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너,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며? 꼴값 떨고 있네. 남들은 관두고 너부터 한번 구원해 봐. 거기서 뛰어내려 와보라니까?” “너, 잘 났다며? 잘난 놈이 그런 것도 하나 못해?”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사건은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지고, 지진이 일어나며 천지가 흔들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로마의 관리인 백부장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태복음서 27:54). 그 자리에는 예수를 지키던 병정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한 지, 겨우 열두 시간 만에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시기도 전이었습니다.

■ 죽음

예수님은 참으로 엄청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배신당하는 일이야 세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당할 수 있다고 치자, 이겁니다. 그래도 배신 사건은 나중에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배신자가 망하거나 처단 당하는 일을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유다는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굴욕 당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입니다. 굴욕을 당했던 이유가 잘못이었음이 나중에라도 입증되면 ‘굴욕 사건’은 회복됩니다. 실제로 백부장의 한 마디로 예수님의 굴욕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문제가 다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최악의 사형법인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에 악형 가운데는 불에 태워 죽이는 것도 있었고, 끓는 기름에 던지는 것도 있었고, 굶주린 사자나 맹수의 먹잇감으로 내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십자가형을 최악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극한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제발 살아만 다오!” 하는 부탁을 합니다. 처절한 부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매달립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면해서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회복을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난 것입니다. 실낱같던 희망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역전’이라는 것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죽은 뒤에 사흘째나 되도록 무덤 속에 계셨습니다. 상황은 완전히 회복불가능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님께서는 만드시고야 말았습니다.

■ 맺는 말씀

군중들이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제자 가운데서 가장 믿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감히 예수님 곁에 접근도 제대로 못할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눈엣가시 같이 여기고 있던 귀족ㆍ양반들이 예수님에게 최악의 굴욕을 안겨드렸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인 죽음의 길에까지 떨어지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고난주간을 앞두고 스가랴 예언자의 메시지를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스가랴서 9:9).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힘차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이제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도무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을 역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이제 최악의 상황이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젠 절망이란 없습니다. 예순님께서 살아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942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41 부활 후 가장 궁금했던 일
940 개켜 있는 수건
939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938 믿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937 그날, 주인공
936 게임의 결과
935 부활절 아침의 사람들
934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
933 [새벽] 홀로 가는 길
932 주님 계신 그 곳에
931 부활의 날, 좋은 날
930 주님의 이슬
929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927 주님의 나라로!
926 아름답게 부활하기
925 그래도 기뻐하십시오!
924 "와서 아침을 먹어라!"
923 부활 드라마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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