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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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8:11-12 
설교일 2006-04-02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주님께서 그 힘센 손으로 나를 붙잡고, 이 백성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나에게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이 백성이 모의하는 음모에
가담하지 말아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이사야서 8:11-12)


■ 들어가는 말씀

2006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지침으로 삼기로 한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진지한 사람’을 불러 쓰신다고 두 주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불러서 쓰신다는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하나님께서는 ‘열정이 있는 사람’을 불러서 쓰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사야는 자기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깨닫고 다른 데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사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이사야가 이렇게 즉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정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중에서도 강력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밥을 먹고, 걸어 다니고, 일을 하고… 하는 보통의 에너지가 아니라, 평상시에는 나타나지 않던, ‘특별한’ 에너지입니다.

1. 잘못된 열정.

어제 밤에 여의도 KBS 본관 앞에 열정 있는 사람들이 2~300명 모였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파면 당한 황우석 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지난해 MBC PD수첩에서 황 씨의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내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KBS 추적 60분에서 그걸 좀 뒤집어 달라고 떼를 쓰려고 모인 겁니다. 그 프로그램은 이미 KBS 내부에서 방영 불가로 정리된 건데, 밖에서 데모를 하면 방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주 전부터 그런 모임을 가진 모양입니다.

비가 오는데도 아이들까지 데리고 모여서 저렇게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참 열이 뻗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 게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의 발표가 난 후에, 노정혜 연구처장 머리채를 잡아채고, 서울대학교 총장 승용차 앞에 드러눕고, 저지하는 경찰관을 폭행하고…. 어제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올라갔는지, KBS 옥상까지 올라가서, 추적 60분 방영하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쳐서 119까지 동원됐었답니다.

분명히 이게 잘못된 짓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열정은 틀림없는 열정입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분명히 열정입니다. 옛날, 바알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800명이나 모여서 바알 신 앞에서 발광을 하던 것도 열정입니다. 옛날 모세가 시내 산으로 율법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아래 있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미친 듯 춤을 추던 것도 열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사순절이라는 게 뭡니까?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을 기억하는 기간이지요.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의 ‘잘못된 열정’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선 군중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난리를 쳤던 것도 분명히 열정입니다.

2. 바른 열정.

자, 그러면 열정이란 이렇게 나쁘기만 한 것인가? 아닙니다. 바알 신 앞에서 미친 듯 난리를 쳤던 바알 선지자들과 맞서서, 저들을 한방에 물리쳤던 엘리야, 그가 광야로 피신해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열왕기상 19:10, 14). 바알 선지자들은 옳지 않은 일에 열정이 있었지만, 그에 맞선 엘리야는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시편 69편 9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예수님에게도 남다른 열정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을 때, 성전 안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 돈 바꾸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채찍을 들고 그들을 치셨고, 그들의 좌판을 엎어버리셨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예수님의 ‘열정’이 나타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의 열정은 어땠습니까? 베드로의 열정은 어땠습니까? 야고보의 열정은 또 어땠습니까? 밧모 섬에서 먹지도 않고 주님 나라의 환상을 본 요한의 열정은 또 어땠습니까? 열정이 있는 신앙인들은 신앙의 위기, 역사의 위기가 왔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서서 괴력을 발휘습니다.

3. 바른 열정은 어디서 오는가?

자, 그러면 바른 열정과 잘못된 열정은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잘못된 열정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욕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올바른 열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구하는 욕구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열정은 악령을 받아서 생기는 것이고, 올바른 열정은 성령을 받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원자력이라는 에너지는 참 위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르게 쓰일 때는 엄청난 이득을 가져오지만, 잘못 쓰일 때는 반대로 엄청난 재난을 가져옵니다. 같은 에너지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악령도 에너지를 내고, 성령도 에너지를 내지만, 그 에너지가 어떻게 쓰이느냐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악령이 달려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사느냐, 악령을 받아 사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받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나의 쾌락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악령이 성령의 흉내를 내면서 접근합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나의 유익을 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는 성령의 엄청난 에너지를 힘입게 됩니다.

■ 맺는 말씀

빌 포드라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들은 이런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눈이 반짝인다.
▶그들이 들어오면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뀐다.
▶굉장히 매력적이다 ― 당신은 그들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들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감이 있다.
▶강인하지만 부드럽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에 충실하고 집중을 잘하며, 산만하지 않다.
▶명석함과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다.
▶긍정적 태도를 지닌 낙천주의자다.
― 빌 포드(문재욱 역), 《삶의 에너지를 높이는 습관들》(도서출판 나들목, 2005), 15-16쪽.


올바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방에 들어오면 방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가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가 직장에 가면 직장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올바른 열정이 있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걱정거리가 사라집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라도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느 자리를 가든 깽판 치는 것보다야, 그래도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낫지만,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분위기를 바꾼다는 말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열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열정은 에너지라고 말씀 드렸지요? 에너지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발전을 하든지, 어디서 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제 제주도에서 정전 때문에 고생들을 많이 했지요? 육지에서 전력이 와야 하는데, 해저 송전선에 문제가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낭패를 겪었던 것입니다.

우리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입니까? 자가발전을 하듯이,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중요한 PC나 서버용 컴퓨터에는 UPS라는 기구를 씁니다. 정전 대비기구라고 할 수 있지요. 갑자기 정전이 되면 시스템 파일이나 중요한 데이터가 졸지에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정전이 되더라도 금방 꺼지지 않고 끌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한 것인데, 이거 달아놓았다고 안심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이건 짧게는 5분, 길어야 30분 정도 버티어주는 구실을 할 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 받지 않아도 잠시 동안은 숨을 쉬고 생활을 버티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 에너지를 가지고는 열정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옆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자동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가보셨을 겁니다. 주유소에 가면 엄청나게 큰 기름 탱크가 있지요. 자동차가 그 탱크 옆에 가기만 하면 기름이 채워집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멍청한 짓을 하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만 다니면 뭐가 되는 줄 알아요. 절대 안 됩니다. 자동차가 주유소에 가면 자동차에 있는 기름 탱크의 뚜껑을 열고 주유소의 호수를 갖다 대고 스위치를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기름이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녀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에너지를 넣어주시고 싶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유소의 기름 탱크에 연결되어 있는 호스를 갖다 대듯이 하나님의 에너지 탱크 호스를 연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이 에너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는 사람만이 에너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을까? 그것은 이사야가, ▶어떤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성전으로 달려갔다는 것, 그리고 오늘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뜻 기쁘게 응답하는 열정 있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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