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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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6-05-01 01: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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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11:5-9 
설교일 2006-04-30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5-9)


■ 들어가는 말씀

일제 때 김구 선생님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하셨는데,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김구(백범정신선양회 편), 《백범일지》(하나미디어, 1993), 169쪽]

또 그분이 쓰신 〈나의 소원〉이라고 하는 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백범정신선양회 편), 《백범일지》(하나미디어, 1993), 252쪽.]

우리가 김구 선생님을 왜 위대한 분이라고 합니까? 물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큰일을 하셨던 분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김구 선생님 말고도 수없이 계시는데, 그 가운데서 김구 선생님을 특별히 일컬어 위대한 민족 지도자라고 한 것은, 그 분이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나라의 통일을 더 소망했습니다. 독립된 나라가 서고, 독립 정부가 들어선다면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한 번 해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그의 꿈은 민족통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소원은 첫째도 통일이요, 둘째도 통일이요, 셋째도 통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꿈꾼 나라는, 외세의 지배나 간섭이 없이 완전히 독립된 나라, 완전히 통일된 나라였습니다.

1. 이사야가 꿈꾼 나라.

예언자 이사야도 나라를 위한 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꿈꾼 나라는 오늘 구약성경 본문에 나와 있고, 노래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오늘 어린이주일입니다만, 이사야가 꿈꾼 나라는 어린이들의 나라였습니다. 아이들이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아이들이 동물들과도 잘 어울리는 나라, 동물들 가운데서 맹수들과도, 그것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뒹굴 수 있는 나라가 이사야가 꿈꾼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서로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파괴하거나, 누구를 괴롭히는 일이 없습니다.

2.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어떻게 하면 그런 나라가 이루어질 것인가, 이에 대해서 이사야는 간단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주님께서 나라를 다스리면 이런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꽃동산 되리!”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낙원 되리라!” 주님께서 다스리시면 사막과 같은 죽음의 땅도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낙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로 실천되는 나라, 주님의 명령이 이행되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데, 거기다가 자꾸 토를 다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작가 최인호 씨가 쓴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는데, 주옥과도 같은 그 말씀들을 악마는 그럴듯하게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선전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악마가 도시의 거리로 걸어 들어오자 많은 무리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악마는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제가 지금부터 악마가 되어서 설교를 해보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만큼의 의지가 없는 사람이다. 마음껏 착취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소유해서 부유한 부자가 되어야 행복한 것이다. 인간은 마음껏 지상의 풍요한 물질을 소유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슬퍼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바쁜 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서양 속담도 있지 아니한가.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여라. 슬픔을 잊게 해줄 위로는 이 지상 위에 얼마든지 넘쳐흐르고 있다. 술과 마약과 도박과 섹스야말로 신이 내려준 위로가 아닐 것인가.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온유한 사람은 거짓의 겸손을 가장하고 있는 위선자다. 마음껏 지배하고 명령하고 짓밟아라. 그래야만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의 땅을 이 지상 위에서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정의인가. 모든 정의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찍이 모택동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 목마른 자에게는 물 대신 고문을 주어라. 고문이야말로 인간의 불평을 잠재울 수 있는 최고의 묘약인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자비를 베풀어라. 너희들이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라는 사교장에 가서 기도하는 행위를 봐서라도, 남에게 베푸는 약간의 자비는 너희들의 우월감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자비를 베푸는 대신 그들에게 굴욕감을 주어라. 마음으로는 절대 베풀지 말고 약간의 돈으로만 자비를 베풀어야만 그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비야말로 팁에 불과할 것이니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성(性)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쾌락이다. 인간은 마음껏 성의 쾌락을 즐길 권리가 있다. 순결은 불감증이며, 정결은 좌절된 성이고, 절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부부간의 지리한 결합은 권태로운 것이다. 노라처럼 인형의 집을 뛰쳐나와라. 자유로운 성만이 그대를 해방시켜 줄 수 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이 지상 위에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차라리 전쟁을 준비하라. 힘없는 자에게는 응징을, 도전하는 자에겐 폭력을, 적에게는 핵폭탄을 사용하라. 폭력은 아름다운 것이다. 내 말을 들으면 너희들은 인기와 명예를 얻고 권력과 재물을 아울러 받게 될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상이 이 지상에 마련되어 있다. 인생은 어차피 한순간의 찰나에 불과한 것, 지금 이 순간의 현재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최인호,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여백미디어, 2000), 150-152쪽.]


(여기까지. 악마 모드를 끝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거다!” 하시면 이거인 것이지, 거기에 다른 설명이나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서 5:3-10). 그냥 이걸로 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뒤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태복음서 5:18).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을 문자로만 해석해서 “일점일획”만 강조하는 문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기본 정신에서는 한 발짝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펄펄 살아 있는 나라, 그 나라가 주님의 나라입니다.

3. 백성이 주님을 아는 나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호세아서 6:3). 여기서, 주님을 알자는 것은, 신학적으로 알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의하고 설명하고 풀이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자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의중을 알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것을 알자,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약자 보호”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힘없는 외국인을 보호하고,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챙기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편애하는 하나님’인 것 같습니다. 성경을 차근차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하나님은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더 두시는 것 같습니다. 본토인보다는 외국인에게, 형들보다는 동생들에게, 남편이 있는 여자들보다는 과부들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보다는 고아들을 더 측은히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 보면 형이 불만을 가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부자들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오해’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 자리에도 한 가족 ‘형제’들이 있습니다만, 형제자매들이 부모가 편애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요즘은 많이 덜합니다만, 예전 저희 어릴 적만 하더라도 어른들이 막내를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형이나 누나들 쪽에서 보면 그게 늘 불만이지요.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해 보니까, 막내가 특별히 더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불쌍해서 그러시는 것이었습니다. “나 죽고 나면 저게 어떻게 살아갈까?” “나 죽기 전에 결혼이나 시킬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인 것이지요. 시간으로 계산해 봐도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날짜가 형들보다는 적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들 입장에서 보면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 자기들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철들고 나니 동생이 있고, 부모님은 꼭 동생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집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극진히 맞이해주는 것을 보고, 형이 그래서 불만을 터뜨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 때 아버지가 형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이것이 부모가 맏이를 보는 심정입니다. 막내는 언제 봐도 불쌍하지만, 맏이는 언제 봐도 믿음직스럽습니다. 비록 나이는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더라도 부모가 맏이를 보는 것과 막내를 보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막내는 불쌍해 보여서, 보살펴주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맏이는 항상 믿음직스러워 보여서, 의지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들 중에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특별히 머리가 나쁘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별나게 못생겨서, ‘저게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나가려나’ 하는 아이가 있는 경우, 그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도 똑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부모가 자기보다 다른 형제를 더 사랑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형제가 불쌍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를 사랑하시고, 과부를 사랑하시고, 떠돌이 외국인을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그것이 부모 있는 아이나, 남편 있는 여자나, 본토인이나 부자를 미워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쌍한 자식을 거두시는 부모의 심정이 곧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 맺는 말씀

이사야가 꿈꾼 나라는 다툼이 없는 나라입니다. 시기와 분쟁이 없는 나라입니다. 함께 어울려 뒹구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거나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는 나라여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장애인, 고아, 과부, 떠돌이 외국인… 이런 사람들을 애틋하게 여기고 그들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편애’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살피는 나라, 이것이 이사야가 꿈꾼 주님의 나라이고, 우리가 꿈꿔야 할 주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가정과, 우리가 사는 이 대한민국과, 인류가 함께 어울려 사는 이 지구가, 진정 주님께서 바라시는, 행복한 주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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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 어느 쪽이 이길까?
912 저승에 간 부자
911 “그만하면 됐다!”
910 시온의 딸과 임금님
909 먹보들의 기도
908 “평화가 있어라!”
907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906 엄마 집
905 복의 생산과 유통과정
904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903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땅
902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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