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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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17:9-11 
설교일 2006-06-18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 날이 오면,
그 견고한 성읍들이 폐허가 될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도망 친
히위 족과 아모리 족의 성읍들처럼,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하나님 너의 구원자를 잊어버리고,
네가 피할 견고한 반석을 기억하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려고 이방의 묘목으로
‘신성한 동산’을 만들었구나.
나무를 심는 그 날로
네가 울타리를 두르고,
그 다음날 아침에
네가 심은 씨에서 싹이 났다 하여도,
네가 그것을 거두어들일 무렵에는
흉작이 되어, 너의 슬픔이 클 것이다.

(이사야서 17:9-11)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십시오. 어떤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네 가족에게 종교상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참 과부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향락에 빠져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것을 명령하여, 그들이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5:3-8)


■ 들어가는 말씀

오늘 구약성서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하나님 너의 구원자를 잊어버리고, 네가 피할 견고한 반석을 기억하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려고 이방의 묘목으로 ‘신성한 동산’을 만들었구나. 나무를 심는 그 날로 네가 울타리를 두르고, 그 다음날 아침에 네가 심은 씨에서 싹이 났다 하여도, 네가 그것을 거두어들일 무렵에는 흉작이 되어, 너의 슬픔이 클 것이다.”

이스라엘이 돌출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려고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방의 묘목으로 신성한 동산을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고 이방 신들을 섬겼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왜 그런 행동을 하였을까요? 왜 이런 돌출행동을 하였을까요?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의인화해서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데, 오늘은 사람이 돌출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외로움의 시대.

지금 여러분은 ‘가족’ 하면 어떤 사람들이 떠오릅니까? 한 10년쯤 전 이야기입니다만, 미국 사람들에게 가족을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나, 아내, 자녀, 애완동물.” 당시에 일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또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나, 아내.”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삼촌, 외숙모, 고모, 고모부, 이모, 이모부, 자형, 동서, 처제, 형, 누나, 동생, 사촌, 조카…, 아참, 그리고 나.” 그러나 이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핵가족 시대를 지나, 저 출산 시대가 되어서 조금만 더 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도 따로 사시고, 삼촌이나 사촌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가 적기 때문에 이모나 고모, 형부나 형수 같은 호칭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한 집안에도 식구들이 많았고, 대문만 나서면 동네사람들이 대부분 친척들이었고, 좀 멀더라도 명절이 되면 일가친지들이 다 모여서 집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만, 점차 이런 풍경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생소하게 보였던 ‘원룸’이나 ‘오피스텔’ 같은 것들이 지금은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공동체생활’ 시대에서 ‘나 홀로’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이렇게, ‘나 홀로’ 시대가 되고 보니까 급속하게 떠오르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외로움’의 문제입니다. 예전 대가족 시대에는 수절과부나 홀아비의 외로움은 있었지만, 요즘 같은 사회적 외로움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나없이 ‘외로움’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진정으로 통하는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통하지 않으면, 남편이 있어도 아내는 외롭고, 아내가 있어도 남편은 외롭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통하지 않으면, 자식이 있어도 부모는 외롭고, 부모가 있어도 자식은 고와와 같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상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제를 가지고 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99퍼센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가지고 온 문제의 뿌리에 ‘외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알코올 중독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원인은 외로움이라는 것입니다. 환각제를 남용한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폭식을 하는 습관이 있다거나, 때로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원인을 찾아보면 대개 ‘외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가는 것도 이 ‘외로움’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길을 찾다가, 찾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그 길이겠지요. 이거,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2.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요즘 시내 나가보면 애견센터가 참 많이 늘었습니다. 저도 아직 구경은 못 해봤습니다만, 애견 미용실도 있고 애견호텔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예전에는 없던 그런 것들이 왜 최근 들어 이렇게 급격히 늘고 있느냐, 그겁니다. 당연히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겠지요.

옛말에도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가깝게 지낼 다른 대상이 필요한데,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들어갑니다. 때때로는, 속된 말로 배신도 때립니다. 그렇지만 개는 배신하는 법이 없지요. 그런 이유 때문에 현대인들이, 특히 선진국으로 갈수록 애완동물을 많이 기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에 사는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내가 밖에서 돌아오면 누가 그렇게 꼬리를 치며 사시사철 반갑게 맞아주느냐?” 틀림없이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있느냐, 그게 문제인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채워야 할 것이 있고, 동물을 통해서 채워야 할 것이 따로 있는 법이지요. 그래도 그런 식으로라도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나은 방법입니다.

외로움의 문제, 고독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술로 어떻게 풀어보려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약에까지 손을 대기도 합니다.

내일 새벽에도 우리나라와 프랑스가 월드컵 축구경기를 하겠습니다만, 응원문화가 2002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지난 13일 토고와 경기를 할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응원을 한다고 모인 사람들 중에서, 쓰레기를 길에다가 함부로 버린다든가, 고성방가를 한다든가, 남의 차 지붕에 올라타고 구른다든가, 골 들어가는 순간을 이용해서 성추행을 한다든가, 편의점에 몰려가 물건을 탈취한다든가, 별의별 난동이 일어났다고 하지요. 심지어는 남녀가 자동차 지붕 위에 올라가서 아랫도리를 내리고 입에 담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돌출행동을 하는가, 제가 보기에 그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해서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게시판에 댓글을 쓰는 사람이 참 많아졌습니다. 건전한 토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보면 요즘 말로, 말도 안 되는 ‘뻘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제가 보기에는 어쨌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어보려는 심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즘 아주 적절한 표현이 있습디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 차라리 욕이라도 먹으면 괜찮은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못 견딘다는 말입니다.

3. 영원히 외롭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애완동물을 키운다든지, 취미생활에 심취한다든지, 자기수련을 한다든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를 하면서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전에 직장생활을 할 때는 몰랐는데, 요즘 집에서 살림만 하다 보니까, 이웃집 아줌마들이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게 눈에 띈다는 겁니다. 또 장로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전에 공직에 매여서 바쁠 때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게 눈에 띄지 않았는데, 잠시 퇴직을 하고 보니, 공연히 그런 것들이 신경이 쓰인다는 겁니다. 두 분 다 아주 적절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한 군데 몰두하는 일이 있으면, 외로움을 덜 탑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사는지, 자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딘가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어딘가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누구나 영원히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몰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일시적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외롭지 않으려면 우리가 몰두할 수 있는 일 이외에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교통’입니다.

예수님과 아주 친밀히 교제하는 가운데, 어디엔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하무적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순서가 중요합니다. 어떤 것을 바탕에 두느냐, 이겁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바탕으로 하여 어디엔가 몰두할 것인가, 아니면 취미생활이나 일에 몰두하다가 심심풀이 땅콩으로 예수님을 찾을 것인가,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느냐 이겁니다.

순서가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좀 지저분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적절한 비유이기 때문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대개 아침마다 똥을 누지요? 그러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지나 치마를 내려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자, 두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바지를 내린다. ▶똥을 눈다. 이게 순서가 바뀌면 어떻게 됩니까? ▶똥을 눈다. ▶바지를 내린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같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순서’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우선이냐, 일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 다 중요하지만, 순서가 뒤바뀌면 아주 추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 외롭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의 사귐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다.” 세상의 물은 일시적으로 갈증을 해소해주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생명의’ 물입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의 방법을 써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방법에 불과합니다. 영원히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사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외로운 사람들은 짝을 잃은 ‘외기러기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했지요. 당시에 교회에 과부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향락에 빠져서 사는 과부(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울은 말합니다. “참 과부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것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입니다.

■ 맺는 말씀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노래로도 많이 부릅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고독합니다. 나와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곁에서 나에게 힘을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나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날마다 찾아와서 문 앞에 서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를 그리워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지금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기만 하면 두 팔을 벌리고 뛰어 들어와서 저와,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외롭지 않으려면 먼저,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틀리면 안 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둘째, 몰두할 수 있는 일을 가지면 우리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외로움과 고독을 잊고, 우리가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22 몸으로 믿으십시오!
921 나의 성공, 누가 가장 기뻐할까?
920 아름답고 즐거운 일
919 2020.2.23 온라인예배 실황 영상
918 마음 갈증 해결하기
917 빛이신 하나님
916 편안한 후회
915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914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913 으뜸 친구
912 어느 쪽이 이길까?
911 저승에 간 부자
910 “그만하면 됐다!”
909 시온의 딸과 임금님
908 먹보들의 기도
907 “평화가 있어라!”
906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905 엄마 집
904 복의 생산과 유통과정
903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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