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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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6-08-06 18: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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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마가복음서 10:41-45 
설교일 2006-08-06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양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마가복음서 10:41-45)


■ 들어가는 말씀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대한’ 사람이란 크고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맞습니다.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참 멋진 일이고,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오해한 게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것까지는 잘 생각한 것인데,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실 것인가, 그걸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맞아요. 그런데 무슨 왕이냐, 그게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정치적인 권력을 잡는 왕이 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왕’ ‘섬김의 왕’이 되시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력을 쥔 왕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 앉아 계셨고, 지금도 그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세상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돈을 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을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가, 이제부터는 확실한 기준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1. 남을 돕는 사람이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마더 테레사 이야기를 하나 해드렸는데, 오늘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일하는 곳에서 봉사를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이불 없이는 잘 수가 없었습니다. 수녀들은 새로 온 지원자를 위해 집 안에 있는 천이란 천은 모두 모아 이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채 반도 만들기 전에 솜이 모자랐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즉시 자기 방으로 가서 베개를 가져오더니 그것을 뜯어 이불솜으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수녀들은 망설였습니다. 그 곳의 책임자인 마더 테레사가 베게 없이 자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문을 열자 거기에는 청년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젊은이?”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수녀님?” 마더 테레사가 도와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내일 영국으로 떠나는데, 이 이불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받아주시겠습니까?”

청년은 가지고 있던 이불을 마더 테레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 이불을 받아 들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자신의 베개를 내놓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 T. T. 문다켈(황애경 역), 《소박한 기적》(위즈덤하우스, 2005), 71-72쪽.


자기가 덮던 이불을 들고 마더 테레사를 찾아온 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당신의 옆자리에 앉히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고향 영국으로 떠나면서, 그까짓 이불, 버리고 가도 될 것이고, 그것이 정녕 소중한 것이었다면, 영국으로 가지고 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서, 그 추운 겨울날 밤에 일부러 먼 거리를 온 것만으로도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새로운 봉사자를 위하여 자기가 베던 베개를 해체시켜서 그 솜을 그에게 주라고 했던 테레사 수녀 역시 아름다운 분인 동시에 위대한 분입니다.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한 분입니다.

내가 남에게 무슨 도움을 받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을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둘 중에 누가 더 위대합니까? 누가 더 훌륭합니까? 누가 더 아름답습니까?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다고 해도, 전혀 남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마더 테레사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지난겨울에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중병으로 이십오 년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환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십오 달러를 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손만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가끔씩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수녀님, 일주일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보내드립니다.” 십오 달러라면 그다지 큰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포기와 희생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 돈으로 빵을 사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빵을 먹은 사람들도 위로를 얻었지만 마더 테레사 역시 위로와 기쁨을 느꼈습니다. ― T. T. 문다켈(황애경 역), 《소박한 기적》(위즈덤하우스, 2005), 76-77쪽.

주는 일은 기쁜 일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데는 엄청난 희생과 고통이 따르지만, 어려운 사정일수록, 남을 도와주는 행동에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2. 남을 높이는 사람이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일은 참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의 ‘위에’ 서서 남을 도와주는 것은 진정한 도움이 아니라 ‘오만’입니다. 그런 행동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양간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탄절 그림을 멋있게 그리라고 그러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위에서’ 도우시지 않고, 우리 ‘옆에서’ 또는 우리 ‘아래에서’ 도우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방금 ‘남을 높이는 사람’이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남을 높일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높은 자리를 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부자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유식하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이거 다 어렵습니다. 그런 것들이 잘 안 되니까, 말로 높여주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말로’ 남을 높여 주려다가는 자칫하면 ‘아첨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칫하면 상대방을 교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식한 사람에게 ‘당신 참 아는 게 많군요!’ 이렇게 말해서 그 사람이 정말 그런 줄 알고 교만해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식한 사람을 유식한 사람 취급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 취급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낮은 사람을 무작정 높게 취급하면 이런 폐단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단 한 가지,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상대방은 자동으로 높아집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 앞에서는 그 사람보다 더 무식해져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 앞에서는 그 사람보다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 앞에서는 그 사람보다 더 힘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참 욕을 많이 ‘잡수셨’(?)습니다.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느냐? 어떻게 남자가 여자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 어떻게 점잖은 사람이 창녀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 어떻게 도둑놈들인 세리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이나, 양반들이 보기에 못마땅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에 상관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 곧 ‘상놈’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동료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높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낮아지라고 하지 않고, 몸소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 남을 높이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기에 합당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3.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이 서른에 집을 나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제일 먼저 어디로 가셨느냐 하면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날이 더워서 바캉스 가신 것도 아니고, 맑은 공기를 쐬시러 산책 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식음을 전폐하시고 40일 동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고행을 하셨겠습니까?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이겠습니까? 내공을 쌓아 사람들 앞에 위압적으로 서시려고 그런 것이겠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시며,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이신 것은 남을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는 낮아지고 남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내공’을 쌓으시려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셨다면, 기도가 끝난 직후에 악마가 찾아왔을 때, 그 동안 쌓은 내공을 써먹을 절호의 기회 아니었습니까? “돌로 빵을 만들어 보아라!” 했을 때, ‘얍!’ 하면서 빵을 만들었다면, 악마가 꼼짝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웃기지 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마의 요청대로 만일 예수님께서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다면 얼마나 ‘폼’ 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우러러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빵을 만드는 것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배를 채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돕기 위해서 오셨는데, 자기 배를 먼저 채워서야 되겠습니까?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지기 위하여 오셨는데, 자기가 높아지실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씨도 안 먹힐 일입니다. 이거 두 가지 다 실패하니까 마귀가 이제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야, 우리 협상하자. 나한테 절만 하면, 이 세상 너한테 다 줄게.”

만일 세상 권세를 가지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돈 많이 가지는 것이 행복의 길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그것도 못하실 일은 아닙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와 창녀들과도 어울리는데, 사탄이라고 못 어울릴 이유가 없습니다. 절 한 번 해서 사탄을 회개시킬 수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하셨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차버리신 겁니다.

돈 많은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 많이 가진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도움으로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남을 돕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목숨 걸고 기도하신 겁니다. 남보다 높아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낮아져야 행복해지는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 힘든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도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남보다 낮아지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게 진짜 기도입니다. 복 달라고, 먹을 것 달라고, 입을 것 달라고…, 그런 것들은 기도할 때 입도 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기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멋진 기도가 무엇입니까? 남의 도움을 안 받기 위해서 기를 쓰고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남보다 높아지지 않기 위해서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 맺는 말씀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염불 외듯이 하나님께 늘 달라, 달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남의 도움에 기대지 않기 위하여 잠시도 정신 놓지 말고, 기를 쓰고 살라는 말입니다. 남보다 높아지지 않기 위하여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목숨 걸고 기도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남을 높일 때, 아니, 내가 낮아질 때, 진정으로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위대한 사람’이란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남보다 높아지지 않기 위하여, 남을 도우며 살기 위하여 목숨 걸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61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60 반전(反轉)의 때
859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8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7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6 양을 찾아서
855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4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3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52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51 기름 값
850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9 두 아들과 아버지
848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7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6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845 힘쓰는 사람이 얻습니다!
844 그래도 내려가야 합니다!
843 “신을 벗어라!”
842 “다 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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