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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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6-10-01 16: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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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복음서 1:19-23 
설교일 2006-10-01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요한복음서 1:19-23)


■ 들어가는 말씀

혼수상태에 빠진 어떤 부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불현듯 하늘로 들려 올라가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너는 누구냐?” 한 목소리가 물었습니다. “저는 시장의 부인입니다” 하고 부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누구의 부인이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네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네가 누구의 어머니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네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렇게 문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네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매일 교회에 나갔고 항상 가엾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 준 사람입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다가 부인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병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부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면에서 부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개의 남편, 아무개의 아내, 아무개의 아버지, 아무개의 어머니, 아무개의 자식…, 이런 것이 ‘나’인 줄 압니다. 또한 나의 직업, 나의 종교, 나의 성격이 ‘나’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의 일부일 뿐, 나의 전체를 규정하는 ‘정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는 누구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있을 때, 당시 양반 계층인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람을 보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도대체 누군데, 이런 데서 사람을 모아 놓고, 되지도 않는 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해서 우리 양반을 욕보이는 거요?” 그런 말입니다. “당신이 메시야요?” “아니오!” “그러면 당신이 엘리야요?”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이 정 도령이오?” “아니오!” “이도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이 때 세례요한은 명답 중의 명답을 말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세례요한이 왜 자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규정했는지, 오늘은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먼저, 세례요한은 이 말에서 자신의 ‘근본’을 밝혔습니다.

요즘 명절을 앞두고 택배회사들이 무지하게 바쁘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택배회사를 통해서 물건을 받아 보셨겠습니다만, 이 때 중요한 것은 뭡니까? 물론 택배회사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이 어디서 만든 것이냐, 누가 보낸 것이야, 그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근본’ 또는 ‘근원’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엘 가는데,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살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원산지’가 어디냐, 하는 겁니다. 국내산이냐, 중국산이냐, 아니면 다른 데서 온 것이냐, 그걸 먼저 확인하고 물건을 사게 되지요.

세례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면서, 그 앞에다가 한 마디를 더 붙였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왜 이 말을 붙였겠습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내서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서 온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열립니다. 나의 바탕이 뭐냐, 나의 뿌리가 뭐냐, 거기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서 15:5).

세례요한은 하나님에 붙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하나님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각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의 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의 행동도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이 되었습니다.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좋은 포도를 맺고, 들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들 포도를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뿌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둘째,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말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정확하게 밝혔습니다.

누가복음서 3장 5절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다. 높은 것은 깎아내리고, 낮은 것은 메우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것은 평탄하게 하는 것, 세례요한은 이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직접 말했습니다. 이건 토목공사를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평등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평등세상’을 외칩니다. 그렇다면 악마가 보낸 사람은 뭐라고 외쳐야 합니까? ‘평등세상’이 아니라 ‘일등세상’을 외칩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내가 일등 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잘 사는 ‘평등세상’을 꿈꾸고 외치지만, 악마에게서 온 사람은 남을 밟고 자기가 맨 위로 올라서려는 ‘경쟁세상’을 꿈꾸고 그런 세상을 남에게도 부추깁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려고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낮아지라고 하셨고, 남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담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사람이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사람입니다. 그 남자의 사람인 그 여자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 여자의 뱃속에는 당연히 그 남자의 씨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씨가 그 여자의 뱃속에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앙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평등세상’이 그 꿈이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람 속에 ‘일등세상’ ‘경쟁세상’의 꿈이 들어 있다면 그 때부터 재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악마의 씨를 품고 사는데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3. 셋째, 세례요한은 자기가 ‘광야의 사람’임을 밝혔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에게 독설을 퍼부었지만, 왕궁 앞에서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양반들에게 ‘독사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도시의 광장에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광야’였고, 그의 삶의 근거지도 광야였습니다. 왜 현장에 가서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광야에서 떠드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세례요한은 결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친다고 그 말이 당사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들어가겠지요. 그래서 결국은 헤롯에게 잡혀서 죽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것은, 광야에는 ‘메아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금님의 귀를 본 사람이 왜 왕궁 앞에서 외치지 않고 숲속에 가서 외쳤겠습니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외침은 그 장소가 숲속이었기 때문에 메아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왜 ‘광야의 소리’를 자처했는가, 저는 그 이유를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한 설교 원고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하는 설교가 너무 과격하고 직설적이지 않느냐, 이런 지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지난 설교들을 읽어보기도 합니다만, 그 때마다 그런 지적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저는 부자도 아니고, 생활비를 많이 받는 큰 교회 목사도 아닙니다. 그래서 ‘비교적’ 과격하고 직설적인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지요. 고교평준화를 반대하는 교육감이, 헌금 많이 내는 우리 교회 장로라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평등세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분을 앞에 두고 ‘고교평준화’를 외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거 함부로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익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말과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광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세례요한이, 남부러울 것 없는 권세와 부를 누릴 수 있는 대제사장의 아들인데, 왜 그런 것들을 다 팽개치고 가출을 했겠습니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광야의 소리’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더하거나 빼거나 고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세상에 외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인간관계와 생활기반까지 다 팽개치고 광야로 나가자, 이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세례요한 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다 사도도 아니고, 다 예언자도 아니고, 다 교사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요한에게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이익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내 이익에 보탬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가까운가, 그것을 원칙으로 삼자는 말입니다.

■ 맺는 말씀

일본 속담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준치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서 먹어본 건지, 아닌지 그것도 분간하지 못합니다만, 어쨌든 상당히 맛이 좋은 생선이라고 합니다. 준치가 얼마나 맛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이런 전설까지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에, 준치는 맛 좋은데다가 가시도 없어서 사람들이 준치만 먹었답니다. 그래서 준치는 멸종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용왕이 모든 어류를 모아 놓고 준치 멸망지환(滅亡之患)의 대책을 토론한 결과, 준치에게 가시가 많도록 해 주자는 의견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용왕은 모든 물고기가 자기의 가시 한 개씩을 뽑아 준치 몸에 꽂도록 했습니다. 준치는 가시가 너무나 많이 꽂혀서 아픔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데도 다른 생선들이 뒤를 쫓아가서 가시를 꽂아서, 준치는 꽁지 부근에까지 가시가 많답니다.

그러니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원래 값어치가 있는 것은 낡거나 헐어도 어느 정도는 본래의 값어치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꼬라지가 별 볼일이 없어도, 아니, 비록 상하고 썩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근본 지체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고고하고 깨끗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쟁세상’ ‘일등세상’을 외치는 악마의 말이 아니라, ‘평등세상’을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 삶을 꾸려가야겠습니다.

“네가 누구냐?” 하고 물을 때,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제가 되고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61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60 반전(反轉)의 때
859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8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7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6 양을 찾아서
855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4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3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52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51 기름 값
850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9 두 아들과 아버지
848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7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6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845 힘쓰는 사람이 얻습니다!
844 그래도 내려가야 합니다!
843 “신을 벗어라!”
842 “다 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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