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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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7-03-11 16: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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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21:1-4 
설교일 2007-03-11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이것은 해변 광야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남쪽 광야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처럼
침략자가 광야에서 쳐들어온다.
저 무서운 땅에서 몰아쳐 온다.
나는 끔찍한 계시를 보았다.
배신하는 자가 배신하고
파괴하는 자가 파괴한다!
엘람아, 공격하여라!
메대야, 에워싸거라!
“내가 바빌론의 횡포를 그치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하겠다.”
그러자 나는,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고통이 이런 것일까?
온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 말씀을 듣고 귀가 멀었으며,
그 광경을 보고 눈이 멀었다.
나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떨었다.
내가 그처럼 보고 싶어한 희망찬 새벽빛은,
도리어 나를 무서워 떨게 하였다.

(이사야서 21:1-4)


■ 들어가는 말씀

해산의 고통, 곧 아이 낳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니까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고통이 이런 것일까?”(이사야서 21:3). 이사야가 무슨 이유로 이런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가,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해산의 아픔을 당해야 했는가, 오늘은 이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 고뇌하는 이사야.

이사야가 이렇게 눈이 멀고 귀가 멀 만큼 정신을 못 차린 이유, 그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떤 이유는,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끔찍한 계시”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양반이 무슨 계시를 받았기에, 그것이 그렇게 끔찍하게 와 닿았는가, 그 계시는 바빌론이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바빌론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천하에 없는 원수입니다. 아직 이사야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바빌론 사람들이 유다에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쓸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로 잡아가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뼈에 사무치게 한이 서린 사람들이 바빌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망한다는 계시를 받았다면 박수를 치고 춤을 추어야 할 텐데, 이사야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이사야는 참 대예언자입니다. 소인배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요나도 훌륭한 예언자였지만, 애석하게도 요나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요나가 도망가다가, 가다가, 결국 하나님께 붙잡혀서 니느웨로 갔지요. 요나는 니느웨 도성을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외쳤습니다. ‘니느웨가 망한다!’ ‘니느웨가 망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내용이니까 거기까지는 좋았지요.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임금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이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갸륵하잖아요? 그래서 용서하셨습니다. 재앙 내리시기로 하신 것을 취소하셨지요.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는데, 하나님께서 취소하셔? 이건 말도 안 돼!’ 엄청 열을 받아서 요나는 도시를 빠져나가 언덕 위에 초막을 짓고 거기 들어앉았습니다. 혹시 모르니, 저놈의 도시가 망하나, 안 망하나, 지켜보자는 심산이었지요. 그쪽 동네가 워낙 사막이라 낮에는 뜨겁잖아요. 하나님께서 박 넝쿨 하나를 자라게 하셔서 요나가 머물고 있는 초막을 덮어주셨습니다. 요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동틀 무렵에 하나님께서 벌레를 한 마리 보내시더니 그 박 넝쿨을 모두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뜨거울 것 아니에요. 거기다가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요나가 화를 버럭 내며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조용히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요나서 4:10-11).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들에 핀 나리꽃 하나도 귀하게 보살피시고, 공중의 새 한 마리도 함부로 떨어뜨리시지 않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회개한 마당에 십이만 명이나 되는 니느웨를 하나님께서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요나보다는 이사야가 한 수 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족의 원수 바빌론이 망한다는데도 이사야는 기뻐하기보다는, 숨이 끊어지는 듯 괴로움을 느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복음서 6:39).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지, 무작정 벌을 주어서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 생각 없는 일부 그리스도인들.

우리가 본 것처럼 이사야는 ‘고뇌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고뇌’ 하면 예수님을 빼놓을 수 없지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이 피가 되어 흐를 정도로 고뇌하셨지요. 그런데 요즘 신앙인에게서는 ‘고뇌’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복이나 받으면서 편하게 살려고만 합니다. 뭐든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입니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옆에 가난한 사람들을 봐도, 그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거니, 하고 쉽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이 분단이 되어 있어도, ‘공산당은 무조건 나쁜 것이니까’ 하고 가볍게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고민을 좀 해보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했지요. 지금 이라크가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 땅입니다. 이사야는,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이 망하는 환상을 보고 허리가 끊어지듯 아파했는데, 부시는 이라크가 미국을 별로 괴롭게 한 일도 없는데도, ‘악의 축’이라고 하여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사야와 부시, 이 가운데서 누가 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까?

작년에 북한에서 핵실험을 했을 때, 일부에서는 북한에 지원하는 것들을 모두 끊으라고 했습니다. 미국과 더욱 붙어서 북한을 압박하자고 했습니다. ‘전쟁 불사’ 목소리까지 나왔습니다.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잘 나가는 목사님들이 앞장서서 그랬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땠습니까? 핵실험 직후에도 민간 교류는 계속 이어졌지요. 남북 당국 사이의 라인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전 같았으면 라면을 사잰다든지, 외국으로 뜰 계획을 세운다든지, 나라가 시끄러웠겠지만, 놀랄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이런 게 그냥 되는 게 아니지요. 최근 10여 년간 남북 사이에 쌓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통일부장관을 하고 있는 이재정 씨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습니다만, 어쩌다가 기회가 있어 공석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습니다. 그분 이야기나 강연을 들어보면 이 양반이 성경을 아는 분이에요. 이분이 성공회 신부인데, 평소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고뇌를 많이 한 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선, 너희는 악, 이렇게 규정해놓고는 힘껏 몰아붙이는 것이 성경의 정신은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상대를 인정하고 안아주고 용납하는 가운데서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 아닙니까?

이렇게 성경의 정신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을 추진한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요즘 북한과 미국이 아주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협상이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지요. 머지않아 미국 땅에 인공기가 펄럭이고, 평양에 성조기가 펄럭이게 될 겁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던 일입니다. 아메리카 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교를 하게 되면, 한반도에는 자동으로 평화가 정착될 겁니다. 수년 안에 평화공존 시대가 열린다는 말입니다.

■ 고뇌하는 그리스도인.

살다 보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있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북쪽 사람들을 볼 때도 그렇게 봤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왜 미운 놈들한테 그렇게 퍼주느냐, 말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이 퍼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먹을 건 충분하지 않아요? 전국의 창고에 쌀이 가득가득 쌓여 있습니다. 그냥 쌓아두는 게 아니에요. 쌓아두는 것도 다 돈입니다. 그거 빨리 소비해야 합니다. 그걸 가지고 북쪽 사람들 굶주림을 해결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지금 남한에는 굶어죽는 사람은 없잖아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동사무소 가서 신고하면 최저생계비는 줍니다. 줄 수 있는 데까지 퍼주면 상대는 자동으로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운 상대가 있지요. 그런 때 그 상대를 죽이려고 하면 절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치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면 앉아서 순순히 죽어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내가 미울 수도 있고 남편이 꼴 보기 싫을 수도 있고, 자식이 원수 같을 수도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미운 상대를 밟고 서서,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더 반발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안아주어야 합니다. 대야에 물이 담겨 있을 때, 손으로 물을 한쪽으로 밀어내면 어떻게 됩니까? 물이 밀려간 채로 그대로 있습니까? 아니지요. 순식간에 다른 물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주변에 미운 사람 몰아내면 참 편할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밀어낸다고 될 일이 아니고,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함께 공존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편하고 복된 길만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말 중에 ‘피할 수 없거든 즐겨라!’ 하는 말이 있습디다. 세상 다 거기서 거기에요.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있는 환경을 감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운 사람도 안아주고 미운 사람도 안아주고, 좋은 일도 즐기고 싫은 일도 즐기고…. 그게 지혜입니다.

■ 맺는 말씀

이사야는 민족의 원수가 망하는 환상을 보고도 아파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망해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망해야 할 나라도 없습니다. 다 우리가 포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명언을 남기기 위해서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명령이 아닙니다. 세상에 원수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감싸고 사랑해야 할 상대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나라를 망하게 하거나 사람을 치시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모두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 치셨더라도, 어떤 나라를 치셨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보고 박수를 쳐서는 안 됩니다. 설령 우리 원수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우리는 이사야처럼 애끊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다운 신앙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형제나 이웃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망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에돔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방관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모릅니다. “네 아우 야곱에게 저지른 그 폭행 때문에 네가 치욕을 당할 것이며, 아주 망할 것이다”(오바댜서 1:1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에돔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 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오바댜서 1:12).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조차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한없는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당장에는 속이 좀 쓰리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득이 됩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너에게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잠언 25:21-22).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상 주신다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거짓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큰 상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862 낮에 출몰하는 귀신
861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860 문제는 믿음입니다!
859 기쁨을 주는 기쁨
858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57 반전(反轉)의 때
856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5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4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3 양을 찾아서
852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1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0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49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48 기름 값
847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6 두 아들과 아버지
845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4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3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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