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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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1서 2:28 
설교일 2007-09-09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2:28〉


■ 들어가는 말씀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도 많고, 정의도 많고, 글도 많습니다. 시인 용혜원은,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 〈사랑하니까〉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다.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같이 걷는 것이다.

서로의 높이를 같이하고
마음의 넓이를 같이하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까지
둘이 닮아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의 시입니다. 사랑이란 앞장서서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쳐져서 떨어지지도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걷는 것이다, 이것이 용혜원의 해석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생떽쥐베리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둘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읍시다.

사랑에 대한 이 두 사람의 정의를 묶어서 다시 말해보자면, 이런 겁니다. “사랑이란, 둘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함께 걷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마음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같은 천장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딴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옛사람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오늘, ‘사랑’이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부부간의 사랑이나, 연인 사이의 사랑이나, 형제자매 사이의 사랑이나, 보편적인 인류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했지요.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이 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적절한 설명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어떻게 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지요. 그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위험한 순간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책임을 물으시거나 책망하시는 대신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베드로를 벌주자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자,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사랑의 관계’를 이어가자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지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로마서 8:35). ‘예수’를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바울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서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했습니다.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과 28절에 보면 똑 같은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요한일서 2:28).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기초적인 것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라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옆에’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겁니다. 예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라는 것이지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곳을 향해 가면서도 ‘동상이몽’(同床異夢) 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훈련을 받읍시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잠시 동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잠시 침묵.)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예수님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참 훌륭한 일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생각이 뭐지?’ ‘예수님의 마음이 뭐지?’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있다면 그것도 참 훌륭한 일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생각을 확실히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디 가서 누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습니까? 서점에 가서 책을 사보면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CBS에서 밤낮으로 나오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 답이 나오겠습니까?

요즘 시대를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하지요. 정보가 단비처럼 온다면 좋은 일이겠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말 그대로 ‘홍수’입니다. 홍수 때 가장 문제가 뭡니까? ‘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 때문에 홍수가 났는데, 정작 부족한 것은 ‘물’이라는 거예요. 마실 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책들, 수많은 동영상들, 수많은 설교들, 수많은 강연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한 답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답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문제가 그겁니다. 성경은 읽으려고 하지 않고, 엉뚱한 것만 자꾸 찾는다는 겁니다.

부부 사이에 위험한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직접 대화’가 잘 안 되는 때입니다. 남편의 일에 대해서 남편 친구에게서 듣는다든지, 아내의 일에 대해서 이웃사람에게서 듣는다든지, 하는 때가 있지요.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사이에 직접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상대의 의사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진다는 것은 썩 좋지 않은 일입니다. 요즘에는 많이 안 보입니다만, 예전에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 너희 아버지 오늘 어디 가신다던?” “오늘 집에서 저녁 드신다던?”

예수님의 생각은 예수님을 만나서 직접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들으면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재미없다고 느껴진다면, 우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책이라도 열심히 읽으십시오. 거기에 예수님의 생각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럼 구약성경은 안 읽어도 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그 배경을 알려면 구약성경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재미없다고 하니까, ‘우선’ 사복음서부터 먼저 읽으라는 것이지요. 사복음서 뒤에 나오는 책들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가 하는 기록입니다. 그것을 알고 읽으면 사도서간문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책이 재미있어질 때가 나중에 반드시 올 겁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보다 좋은 길은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훈련도 받지 않고 성과만 내려고 합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목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에게 배운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것 다 못해도 좋습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은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일합시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기로 작정하고, 성경을 읽으며 훈련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뭐가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일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일을 해야지요. 일을 해야 한다니까, 뭐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 같이 세계 방방곡곡 다니면서 선교를 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우리가 다 바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가장 기본적인 일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어설프게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라고 했습니다(17).

시인 곽노순은 이런 말을 합니다.

지도를 펼치면 많은
산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강들의 이름도 있다.
그러나 산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강은 그렇게 불리는지
모르면서 흐른다.

우리 또한 산과 같지 않은가?
강과 같지 않은가?
인간들끼리 모여 살 때 편리상 쓸 뿐
내 이름이 곧 나려니 생각 마라.
때때로 강처럼 이름을 잊고
산처럼 멍하게 그런 게
무엇이냐고 물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주의 일부로 머물라.
그래서 본래의 이름 없는
큰 존재로 살다 가라.

― 곽노순, 〈때때로 강처럼 이름을 잊고〉 전문. 곽노순, 《신의 정원》(도서출판 네쌍스, 1995), 27쪽.


우리는 꽃을 보고, “얘, 넌 왜 일 안하고 거기 가만히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위를 보고, “얘, 넌 왜 멍청하게 그러고만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자기 일입니다. 바위도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 자기 일입니다. 제 구실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조급합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조직도 그렇습니다. 잠시라도 무슨 이벤트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머물러 있을 때는 머물러 있는 것이 ‘일’입니다. 다른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주님께서 시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앉아 있느냐,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앉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일’입니다.

■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읽지 않고 많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성경만 읽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누가 옆에서 필사적으로 말려도 ‘옳은 일’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861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60 반전(反轉)의 때
859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8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7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6 양을 찾아서
855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4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3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52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51 기름 값
850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9 두 아들과 아버지
848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7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6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845 힘쓰는 사람이 얻습니다!
844 그래도 내려가야 합니다!
843 “신을 벗어라!”
842 “다 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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