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전대환 채널 바로가기

마을지기 2007-10-21 13:42:51
0 7195
성서본문 사무엘기상 23:14-18 
설교일 2007-10-21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리하여 다윗은 광야의 산성을 찾아다니며 숨어서 살았다. 그는 바로 십 광야의 산간지역에서 살았다. 그 동안 사울은 날마다 다윗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노리고 출동할 때마다, 다윗이 그것을 다 알고서 피하였다.

다윗이 십 광야의 호레스에 있을 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호레스로 다윗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는 다윗에게 말하였다. “전혀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를 해치려는 나의 아버지 사울의 세력이 자네에게 미치지 못할 걸세. 자네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걸세. 나는 자네의 버금가는 자리에 앉고 싶네. 이것은 나의 아버지 사울도 아시는 일일세.”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은 다시 주님 앞에서 우정의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다윗은 계속 호레스에 머물렀으나, 요나단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사무엘기상 23:14-18〉


■ 들어가는 말씀

윌리엄 펜이 『고독의 과실』중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내인 동시에 친구일 수도 있는 여자가 참된 아내이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여자는 아내로도 적당하지가 않다.” 친구 같은 아내가 가장 적합한 아내라는 말이지요. 작년 5월에 현대백화점에서 직원 340명을 대상으로, 어떤 배우자가 가장 좋은가, 하는 설문조사를 해봤더니, 남편의 43.5%가 ‘친구 같은 아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다음, 40.6%는 현모양처 형 아내다로 답했고, 15.9%는 사회생활과 집안일에 모두 만능인 아내를 꼽았습니다.

부부도 그렇지만, 다른 모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 선생님과 제자 사이…. 이 모든 관계가 친밀한 친구처럼만 엮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세상이 부드러워지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우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정에 대한 명언을 꼽으라면 저는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최고로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복음서 15: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말씀을 다른 관계에다가 대입시켜도 다 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아내를 위하여, 남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구약성경에 보면 친구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바로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나이는 비슷했겠지만, 사실 다윗과 요나단은 정말 가까워지기 어려운 관계였었는데, 이 두 사람은 그런 관계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요나단의 아버지가 사울 임금이지요. 그런데 사울은 틈만 나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편에서 본다면 요나단은 원수의 아들입니다. 요나단 편에서 본다면 다윗은, 자기가 올라야 할 왕의 자리를 가로채려고 하는 정적(政敵) 가운데 정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연인관계보다도 깊은 우정을 만들어냈습니다.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나눈 친구

일반 역사를 보면 흔히 그 주인공(主人公)이 사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역사와 사건들에는 하나님과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반드시 중요하게 거론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계약을 맺을 때,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이라면 자연물을 증거로 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이라면 하나님과 자연물을 함께 증인 또는 증거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가장 허물없는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 또는 ‘불알친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어린 시절, 자연과 함께 뒹굴며 놀던 친구가 좋은 친구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자연을 말할 때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맹자》에 나오는 말이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원기를 말합니다. 어릴 때는 불알친구로 자라, 성장해서는 함께 호연지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비록 ‘불알친구’는 아니었지만, 청년기의 ‘호연지기’를 나눈 친구였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낌새를 챈 다윗은 사울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요나단에게 협조를 구합니다. 이 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들로 나가자”고 제안합니다(사무엘기상 20:11). 두 사람은 들로, 곧 자연으로 나가서 중요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왕궁에서 언약을 해도 되고, 왕궁이 위험하다면 도성 안의 다른 외진 곳을 선택해 거기서 언약을 맺어도 될 것을, 두 사람은 굳이 함께 활을 쏘던 들로 나가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자연과 자꾸 떨어져갑니다. 시인 장용철 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통 속 같은 아파트에서 자고, 통 속 같은 엘리베이터를 통해, 통 속 같은 지하철을 타고, 통 속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다가, 마침내 통 속 같은 관(棺) 속에 들어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의 궤적입니다. 통 속 같은 세상에서 살다 보니 어느새 생각조차 통조림이 된 듯합니다. 관념의 뚜껑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봅시다. 우주에는 칸막이가 없고, 구름의 길에는 가드레일이 없습니다. ― 풍경소리, 《풍경소리2》(샘터사, 2005), 92쪽.

우리 삶이 통조림처럼 되어간다는 이야기지요? 아토피다, 뭐다 하는 병들이 다 ‘통조림 병’ 아닙니까? 기회 있을 때마다 자연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한 해에 몇 차례씩 야외로 나갑니다만, 그런 그냥 시간 때우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통조림 되는 것으로부터 좀 피해 보자, 그런 철학적 뜻이 있는 겁니다. 자연과 함께 하는 우정,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랑, 자연과 함께 하는 신앙, 자연과 함께 하는 비즈니스…. 이런 것들은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 서로 존중하는 친구

다윗과 요나단이 들로 나가서 무엇을 했는가. 같이 도시락 까먹으면서 논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중요한 약속을 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요나단은, 결국에는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주님의 인자하심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주게.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주님께서 자네 다윗의 원수들을 이 세상에서 다 없애 버리시는 날에라도, 나의 집안과 의리를 끊지 말고 지켜 주게”(사무엘기상 20:14-15).

이건 나중의 이야기입니다만, 요나단이 그 뒤에 다시 다윗을 찾아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걸세. 나는 자네의 버금가는 자리에 앉고 싶네. 이것은 나의 아버지 사울도 아시는 일일세”(사무엘기상 23:17). 자기는 다윗의 ‘버금가는 자리’에 앉고 싶다는 말입니다. 권력을 두고는 부자지간에도 칼부림이 나는 것이 보통인데,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밑에서 일하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경쟁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치열한 법입니다. 서울에서 어떤 사람이 연봉을 2억을 받는다더라, 이런 것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 그는 같이 입사해서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사람이 나보다 연봉을 100만 원 더 받는다, 그건 견디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조선일보 방사장의 집이 몇 백억 짜리라더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집이 무지무지하게 비싸다더라, 이런 것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까이에 살던 이웃사람이 우리 집보다 훨씬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그건 무지하게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요나단은 지금 자기 아버지가 임금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임금이 되어야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 자리가 자기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국내 사정을 볼 때 감이 잡히는 겁니다. 만일 이때, 요나단이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이른바 ‘정치공작’을 했다든지, 다른 술수를 썼다든지 했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졌을 겁니다. 자기 신변도 위험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깨끗이 단념하고 친구를 앞세웠습니다. 물론 앞뒤 상황을 살펴봤을 때 승산이 없어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처럼 친구와의 우정을 꽃피워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요나단에게 다윗을 믿고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이름으로 만나는 친구

오늘 본문말씀 18절에 보면, “이 두 사람은 다시 주님 앞에서 우정의 언약을 맺었다”라고 했지요. 여기서 ‘주님 앞에서’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언약을 맺었다면 그들의 우정이 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연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들의 우정을 오래, 아니 죽기까지, 거기에 더해서 요나단이 죽고 나서 요나단의 후손에게 이르기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부부싸움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만, 신혼 때는 가끔 다투었지요. 저는 아내에게 늘 고마워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 당시에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아내는 친정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다 일러바치는 겁니다. 그러면 제 아버지께서 며느리를 달래시는 겁니다. “그래, 네가 이해해라. 걘 어릴 때부터 그런 버릇이 있어. 나이가 들면 고쳐지겠지.” 그러고 나서 저를 호출하시지요. 제가 아버지 계신 데로 달려가면 그것으로써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는 겁니다. 어른 앞에서 문제를 풀어놓고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자녀들의 혼사 때 꼭 ‘뼈대 있는 집안’에서 상대를 고르려고 고집했지요. 그것은 그런 집안에서 자란 젊은이가 인간성이 바르게 형성됐으리라는 점도 이유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가정이 쉽게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양가의 어른들이 버티고 있으면 젊은 부부가 웬만큼 다투더라도 쉽게 갈라서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른’이 맡아야 할 몫입니다. 한 부모 밑에서 자란 동기간들도,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잘 지내다가도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맺은 우정은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 맺는 말씀

지금까지 우리는 ‘우정’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 세 가지는, 첫째, 호연지기를 나누는 우정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자세로 우정을 엮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우정을 꽃피우자는 것이었습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자연과 함께, 흙과 함께 엮어진 인연,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부부사이,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사랑, 이것은 웬만해선 깨지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이 세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으면 정말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과 함께, 서로 존중하며 모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861 문제는 믿음입니다!
860 기쁨을 주는 기쁨
859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58 반전(反轉)의 때
857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6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5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4 양을 찾아서
853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2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1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50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49 기름 값
848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7 두 아들과 아버지
846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5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4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843 힘쓰는 사람이 얻습니다!
842 그래도 내려가야 합니다!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