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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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8-01-13 1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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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에베소서 2:11-22 
설교일 2008-01-13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에베소서 2:11-22〉


■ 들어가는 말씀

저의 대학 동기생들 가운데, 아주 가깝게 지내던 몇 친구가 있는데, 그 가운에 하나가 예전에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는, 자기 아들 이름을 ‘담터’라고 지었습니다. 그 많은 좋은 이름들 다 두고 어째서 ‘담터’냐, 했더니, 대답이 이랬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민족과 민족의 담을 허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담을 허시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담을 허셨으니, 그리스도처럼 담을 허는 사람이 되어라, 하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성경 본문 말씀을 보면, 정말로 그리스도는 담을 허신 분입니다. 어떻게 담을 허셨는가, 무엇을 가지고 담을 허셨는가, 보니까 망치나 해머로 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담을 허셨는가, 에베소서 2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몸으로 담 허물기’라고 붙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담을 허무셨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담 허물기에 나서야 합니다. 지금도 인종과 종교의 벽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벽이 있습니다. 이 벽들을, 예수님처럼 우리도 몸으로 허물어야 하겠습니다.

■ 인종과 종교의 담

첫째, 우리는 인종과 종교의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에베소서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유대 지방이 아니라 이방 땅입니다. 11절에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우습게 알던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해서 그 벽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바울이 늘 이야기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이나 유대 사람이나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18).

물론 이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완성되었지만, 예수님은 평소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구원 받아야 할 대상에서 제외시켜 놓지 않았습니다. 친히 그들을 찾아가서 만났고, 그들과 밥을 함께 먹었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이 돼서 드디어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기 예수가 정결예식을 하러 성전에 왔을 때였습니다. 아기 예수를 받아 안은 시므온은 너무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누가복음서 2:32).

‘이방 사람들을 비추는 빛!’ 이것이 주현절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아라는 것이지요. 성탄절에 자주 등장하는 동방박사도 이방인들이지요. 그들에게 별빛이 나타났습니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계시였습니다. 그 전의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

둘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민족과 민족, 종교와 종교의 벽을 허무셨다고 했는데, 그보다 좁게,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담이 없는가, 이웃 사이에는 담이 없는가, 가족 사이에는 담이 없는가, 이 문제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평화롭게 지내는 문제도 중요하고, 종교와 종교가 화합하고 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과 개인이 가깝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도 몸으로 푸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자리에 앉아서 책을 쓰거나, 강의만 하신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한평생 발로 걸어 다니며, 몸으로 부딪치신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세리들도 직접 만났습니다. 창녀들과도 직접 만나셨습니다. 거지들과도 직접 만나셨습니다. 문둥이들과도 직접 만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직접 만나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밥을 잡수셨습니다.

함께 만나서 밥을 먹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공동으로 함께 밥을 먹을 때, 그 공동체에 평화가 깃듭니다. 가족과 가족이 함께 모여 두 식구가 함께 밥을 먹을 때, 두 가족 사이에 평화가 깃듭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나 밥을 먹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 평화가 생겨납니다.

한국 교회에 참 좋은 전통이 하나 있었는데, 요즘은 자꾸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성미’ 제도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성미를 함으로써, 그 성미 쌀을 먹는 사람들이 한 식구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밥을 할 때마다 쌀을 한 숟가락 덜어서 따로 보관해둡니다. 주일날 교회 올 때 그 성미봉지를 들고 오지요. 그러면 그것을 모아다가 목사가 밥을 해먹습니다. 사실은 쌀이 아니라 직접 밥을 나누어먹으면 더 좋은데, 밥을 며칠씩 둘 수는 없지 않아요? 그래서 쌀을 덜어서 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곡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고기 제물 가운데 제사장의 몫을 떼어서 그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예언자들도 백성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습니다. 그것을 먹고 제사장들은 힘을 얻어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을 먹고 예언자들은 백성의 권익을 위해서 권력자들과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성미 쌀로 밥을 먹는 목사는 성도들과 한 식구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먹고, 목사가 ‘한 식구’인 성도들을 위해서 예배 준비도 하고 기도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으로 나누는 친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귀차니즘’ 때문에 그런 것 잘 안 하려고 하지요. ‘돈으로 헌금하면 그걸로 쌀을 사면 될 걸, 왜 귀찮게 쌀을 따로 모으느냐’ 그런 논리인 것 같은데, 그 생각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요,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물론 필요할 때는 돈도 쓰셨겠습니다만, 많은 일을 ‘몸으로’ 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우리는 몸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들도 가급적 많은 시간을 몸으로 부대껴야 합니다. 성도들 사이의 친교와 평화를 위해서도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부부가 일심동체인 것도 몸으로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우리 몸을 던져야 합니다.

■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담

마지막으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벽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굉장히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아무나 만날 수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함부로 이름도 못 부르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엄청나게 두꺼운 벽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해서, 그 벽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 ‘말로’ 중재하신 것이 아닙니다. 몸을 던져서, 몸으로 중재하셨습니다.

예수님 덕에,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벽이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몸을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몸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몸을 구부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몸을 낮추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을 주님 앞에 갖다놓아야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이 주님 앞에 있어야 하나님과 소통이 잘 됩니다.

지난주에 저는 어떤 책을 읽다가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박지영, 《유쾌한 심리학2》(도서출판 파피에, 2006), 109쪽.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청춘남녀입니다. 두 사람은 가끔 진한 키스도 합니다. 19세 미만인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진한 키스를 하면 침과 침이 접촉을 하게 되지요. 거기까지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만일 사랑하는 그이가 내 국물에다가 침을 뱉어놓았다고 할 때, 그 국물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제기였습니다. 이거 웬만해서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맞아. 사랑하는 그녀의 머릿결, 손만 스쳐도 전기가 찌릿찌릿 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인데, 만일 그것이 세면대 안에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다면, 그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침은 침이 있을 자리에 있어야 제 기능을 다 합니다. 머리카락은 머리에 붙어 있어야 아름다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붙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몸을 하나님 앞에 갖다 놓아야 행복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에 신자의 몸뚱이가 예배당에 있으면 향기가 납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가 다른 데 가 있으면 악취가 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장소가 뭐 중요해?’ 이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지요. “Out of sight, out of mind!”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헌신’(獻身)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몸을 주님 앞에 드린다는 말입니다. 몸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도 몸소 우리를 도우실 겁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친히 주님께서 달려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내 몸을 주님 앞에 나타낼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원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허셨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담을 허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허셨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말뿐만이 아니라, 몸을 드려서, 몸을 주님 앞에 내놓음으로써, 몸을 사람 앞에 내놓음으로써, 주님의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주님의 크나큰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62 낮에 출몰하는 귀신
861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860 문제는 믿음입니다!
859 기쁨을 주는 기쁨
858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57 반전(反轉)의 때
856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5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4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3 양을 찾아서
852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1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0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49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48 기름 값
847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6 두 아들과 아버지
845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4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3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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