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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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사도행전 5:27-42 
설교일 2008-01-27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성서 본문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율법 교사로서,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 의회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에, 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하십시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소.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그 뒤에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5:27-42〉


■ 들어가는 말씀

누가복음서 16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사람이 제일 헷갈릴 때가 이런 때입니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서 춤을 춰야 할지 잘 모를 때, 우리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세상 일이 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지요. ‘사랑을 택하자니 돈이 울고, 돈을 택하자니 사랑이 우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자니 세상에서 왕따 될 것 같고, 세상풍조를 따르자니 하나님 앞에서 못할 짓이라, 갈등을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은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자, 이밖에 다른 해결책은 없습니다. 여러 가지 판단 기준이 헷갈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만사가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세상 풍조나 돈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생기는가, 저는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십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관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전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신문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당신들은 우리의 말을 무시하고 온 예루살렘에 예수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니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라,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사도행전 5:30).

대답이 깔끔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으니 잔소리 말고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상대는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라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우두머리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란 사람이 그것을 막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게 누구의 말입니까? 베드로가 한 말이에요. 베드로가 누굽니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신문을 받으실 때, 무서워서 뜰 밖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었지요. 옆에서 누가 물으니까, 나는 저 사람 전혀 몰라, 하면서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겁쟁이지요. 그런 베드로인데,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대제사장에게 신문을 받습니다. 말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람을 무서워하였지만, 이제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중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지구에는 6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 맞추어주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 기쁘게 해드리면 이 세상 그 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 동지를 보내 주십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자 그 사람들은 격분했습니다.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담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담대했다가 이제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아직 일이 다 안 끝났기 때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여기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우군을 하나 보내주셨습니다. 적진에서 동지가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신문했던 의회의 의원 가운데,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 교사였고,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의회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게 한 뒤에, 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말리엘이 한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해야 합니다. 예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고 다닌 일이 있었지요. 그때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지 않습니까?

― 그 뒤에 또 이런 일이 있었지요. 유다라고 하는 갈릴리 사람이 일어나더니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지요. 그도 죽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흩어지고 말았지요.

―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뗍시다.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겁니다.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이것은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운 일입니다. 대제사장과 의회 의원들 앞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사도들의 동지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보니 옳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겁만 주고는 풀어 주었습니다. 이게 돈으로 해결될 일입니까? 사람에게 부탁해서 될 일입니까? 아는 사람이 있다고 될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적을 동지로 만들어주시니까 가능했던 일입니다.

요즘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만, 어느 조직에 가든 ‘라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라의 정치에는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지요. 조폭세계에서도 ‘파’가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들이 모이는 노회에도 보이지 않는 ‘라인’이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은근히 보이지 않는 ‘편’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느 줄에 붙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되지요.

실제로 이런 ‘편 가르기 놀음’에 들어가 보면 참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이쪽 편에 붙자니 저쪽 편 사람들과 안 좋을 것 같고, 그렇다고 저쪽 편에 들기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소인배라면 어느 편이든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 편의 구성원이 되어서, 자기편 두령이 지침을 내리면 두말 않고 거기 복종합니다. 그런데 정말 큰일을 하는 사람은 ‘편’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의견이 나올 때, 이것이 우리 편 의견이냐, 저 편 의견이냐, 그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의냐, 아니냐, 그것을 먼저 따집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더 신뢰하는가, 그것은 자기편에 붙어서 두령의 지침에 따라 거수기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사람은, 어느 ‘편’의 의견보다는 ‘정의’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의’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과, ‘편’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이 다 다릅니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들면 상당히 우리 삶이 피곤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오히려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보다는,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동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심지가 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습니다.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잃겠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작정한 사람은 결코 잃지 않습니다. 사람 가운데서 동지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도 얻지 못하지만,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서도 진정한 동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자격을 주십니다!

이사야서 51장 7~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를 아는 사람들아, 마음 속에 내 율법을 간직한 백성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비방하는 것에 놀라지 말아라. 좀이 옷을 먹듯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벌레가 양털을 먹듯이 그들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는 영원하며,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인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1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이는 나, 바로 내가 아니냐? 그런데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는, 너는 누구냐?”

이런 말씀들을 보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무리 외치고 떠들어도, 이게 참 어렵겠다는 겁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복종하라고, 제가 소리소리 질러도, 여러분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아니면 그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복종하기보다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별 볼일 없는 전대환 목사가 떠드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대예언자인 이사야가 그렇게 외쳤어도 백성들이 말을 안 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41~4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다가 고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신앙입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점 찍어주신 ‘진짜배기’ 신자여야만 그런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맺는 말씀

지금까지 저는 ‘하나님께 복종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글 가운데 ‘복종’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은 복종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 한용운의 시, 〈복종〉 전문. 독자 693인 편,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삼일서적, 1985), 46쪽.


우리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자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자유는 ‘복종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께 복종할 것을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주님께 복종할 때,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 복종할 때 ▶첫째, 우리는 그 누구보다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진정한 동지를 얻습니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만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861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860 반전(反轉)의 때
859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858 길은 멀고 짐은 무겁지만
857 매일 새로 태어나기
856 양을 찾아서
855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854 그대 모습 보여주오!
853 내 몸, 어떤 의사에게 보일 것인가?
852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제물
851 기름 값
850 성공한 예언자 벤치마칭
849 두 아들과 아버지
848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847 삼일절에 생각하는 ‘나라 사랑’
846 머리로 알기 vs 몸으로 알기
845 힘쓰는 사람이 얻습니다!
844 그래도 내려가야 합니다!
843 “신을 벗어라!”
842 “다 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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