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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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요한복음서 10:7-15 
설교일 2007-05-13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가정 


■ 성서 본문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요한복음서 10:7-15)


■ 들어가는 말씀

우리가 잘 아는 노래 가운데,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1823년에 영국의 비숍(Bishop, Henry Rowley, 1786.11.18~1855.4.30)이라는 작곡가가 미국 작가인 페인(John Howard Payne, 1791.6.9-1852.4.9)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이렇게 시작됩니다. 김재인 씨가 개사를 한 것인데, 원문과는 약간 다릅니다. 노랫말로 만들다 보니까 그랬겠지요. 이 시를 다시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즐거운 곳과 궁궐을
나 다녀보지만,
우리 집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세상에 우리 집 같은 데가 없네.
하늘의 안식을 나 찾아보지만,
이 세상 어디를 다녀 봐도
그런 곳은 만날 수 없네.
나의 가정, 나의 가정,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의 가정이여!
세상에 우리 집 같은 데가 없네.
세상에 우리 집 같은 데가 없네.

나 집을 떠났더니
온갖 호화로움이 나를 유혹하네.
오, 나의 오두막 초가집을 돌려주오.
내가 손을 내밀면
새들이 다가와 노래 불렀지.
그들을 나에게 돌려주오.
마음 편한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나.
나의 가정, 나의 가정,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의 가정이여!
세상에 우리 집 같은 데가 없네.
세상에 우리 집 같은 데가 없네.

Mid pleasures and palaces though I may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A charm from the sky seems to hallow us there,
Which, seek through the world, is ne'er met with elsewhere.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An exile from home, splendor dazzles in vain:
O, give me my lowly thatched cottage again!
The birds singing gayly that came at my call;
Give me them,—and the peace of mind dearer than all!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 목자 없는 양

오늘 구약성경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시편 23:1-6).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이 말씀이 이 시의 결론입니다. 주님의 집이 어디입니까? 주님께서 목자 되시는 목장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도 우리는 목장에 살기보다 밖으로 나가 쾌락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서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그랬지요. 둘째 아들은 부족함 없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밖에 나가서, 내 마음대로 살면서도 주님께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지요. 그것은 아닙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가 보호받기를 바란다면, 주님과 함께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목자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더 솔깃하게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저나 여러분이나 주님 말씀 안 듣고 사는 것은 똑 같습니다. 우리는 다 목자 말 안 듣고 제멋대로 다니는 말썽꾸러기들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누가복음서 6:29).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지!’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럼 예수님이 ‘헛소리’ 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애가 3장 30절에도 똑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예수님 말씀 안 듣는 것은 우리나 옛날 초창기 교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세상 법정에 소송까지 걸어가면서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바울이 말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고린도전서 6:7). 그러니까 우리가 문제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를 알아야 병을 고치지요. 요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그겁니다. 아무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앞에서 문제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선한 목자, 나쁜 목자

자, 그렇다면 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그건 간단합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약성경 본문 가운데 요한복음서 10장 11절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선한 목자가 어떤 목자인가, 예수님께서 그 기준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목자, 이런 목자가 선한 목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선하지 않은 목자는 어떤 목자입니까? 에스겔서 34장 2절부터 5절까지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요약하면 이겁니다. ‘양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 이런 목자가 나쁜 목자요, 삯꾼 목자입니다. 목자, 하니까 우리는 자꾸 목사를 생각합니다.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비슷해서 그렇겠지요. 그러나 요즘은 목사만 목자인 것은 아닙니다. 양떼를 부르는 것은, 자칭이든 타칭이든, 일단 목자 축에 듭니다. 양떼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양들을 불러 모으는 사람들이 다 목자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선한 목자도 있겠고, 나쁜 목자도 있겠지요.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요즘 정치인들이 언론에 많이 나옵니다. 이분들,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까? 다 목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지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 그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분들이 삯꾼 목자인지 선한 목자인지 어떻게 분간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지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으면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나 양들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도둑이요, 강도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거를 통해서 정치인을 선택할 때 제일 먼저 봐야 할 것이 이 대목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 인상이 어떻다, 말투가 어떻다, 출신지역이 어디다, 이런 것들에 더 신경을 씁니다.

또 하나, 우리가 짚어봐야 할 것이 텔레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자꾸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거든요. 사람을 불러 모으는 데 텔레비전처럼 영향력이 큰 매체도 드물 것입니다. 예전에 텔레비전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보상자’라고 했지요. 사람을 그 앞에 묶어두고 다른 일도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그런 별명이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어떤 때는 ‘마귀상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는 유익한 것도 없지는 않지만, 환경을 걱정하고, 양극화를 걱정하고, 인간 사이의 단절을 걱정하고, 어린이에게 꿈을 주는 프로그램들은, 수도 적고 시청률도 낮습니다. 광고가 안 들어오니까 이런 프로그램들은 자꾸 자취를 감춥니다.

요즘은 방송 프로그램들이 거의 돈을 따라 춤을 춥니다. 돈을 쳐 들이는 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몰리는 프로그램에 광고가 많이 붙고 돈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돈에 끌려 다니는 이런 방송이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TV 광고들 조금만 눈여겨보세요. 오로지 돈 아닙니까? 소비가 미덕이고 돈이 곧 하나님이에요. 성경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분입니다. 거짓 목자는 양떼들의 목숨이나 안전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TV 프로그램들은 어디에 속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요즘 나오는 TV 광고 가운데 가장 보기 싫은 게 사채 광고입니다. 일 년만 빌려 써도 이자가 거의 곱으로 붙는 것은 숨기고, 누구나 전화만 하면 돈을 빌려준다니까, 사람들이 속기 딱 좋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평소에 좋게 생각했던 연예인들까지 돈으로 매수해서 시도 때도 없이 광고를 내보내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양들을 모아다가 모조리 찜 쪄 먹겠다는 사람들이에요. 거짓 목자들의 목소리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메시지는 이런 겁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레위기 25장 37절.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신명기 23장 19절. “당신들은 동족에게 꾸어 주었거든 이자는 받지 마십시오. 돈이든지 곡식이든지, 이자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느헤미야기 5장 10절에서 11절. “제발, 이제부터는 백성에게서 이자 받는 것을 그만둡시다. 그러니 당신들도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집을 오늘 당장 다 돌려주십시오.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꾸어 주고서 받는 비싼 이자도, 당장 돌려주십시오.”

은행이나 공용금고나 신용조합처럼, 돈을 빌려주면서 사무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또는 빌려가는 사람들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뜻에서 약간의 이자를 받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로지 이자를 받아 돈을 벌 목적으로 사채놀이를 하는 것은 삯꾼 목자가 하는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런 짓을 하는 TV를 성경보다 더 좋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TV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보다 더 믿지 말라는 것이지요. 선한 목자의 말보다 더 신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 선한 목자 알아보기

요한복음서 10장 1절에 보니까 예수님은 양떼에게 오실 때 ‘문으로’ 드나드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홍길동처럼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깨비처럼 느닷없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분이 아니에요. 들어오실 때도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실 때도 문으로 나가십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말세에 예수님께서 ‘도둑 같이’ 오신다고 하니까, 오해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도둑 같이 오신다는 이야기는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이야기지, 몰래 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누구나 다 알아차릴 수 있게 상식적인 방법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24장 23절부터 27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시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오’ 혹은 ‘아니, 여기 계시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계신다’ 하고 말하더라도 너희는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계신다’ 하더라도 너희는 믿지 말아라.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에까지 번쩍이듯이, 인자가 오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오늘 신약 본문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유대인들이 ‘누구를 안다’는 말을 할 때, ‘야다’(yada)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김 씨인지 박 씨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런 걸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속들이 안다는 말이에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안다는 것은 그 여자와 동침할 정도로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우리 속마음까지 다 꿰뚫어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떼를 아시는 분이 양떼가 납득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오실 일은 없습니다. 양떼가 못 알아들을 말씀을 하실 리도 없습니다.

■ 맺는 말씀

세상에는 우리를 부르는 데가 참 많습니다.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우리에게 ‘웰빙’을 주겠다고, 오라고 하는 데가 많습니다. 다 좋은 목자가 되어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리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사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분간하고 목자를 따라가기 위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저는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는 분입니다.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선한 목자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이렇게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분이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 앞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에 가서 이런 노래를 기쁜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분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까? 회사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까? 영화배우나 탤런트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까? 이름 있는 명사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수 있고,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기에, 편법을 쓰지 않습니다. 반드시 문으로 드나듭니다. 우리 상식으로 판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유혹하는 소리들은 다 헛소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오십니다. 양이 못 알아보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어버이주일이니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청소년 여러분, 젊은이 여러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부모님은 예수님 다음 가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의 특징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우리 육신의 부모님들도 이 특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부모님만큼 여러분을 잘 먹이시고, 보살피시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둘째, 여러분의 부모님 이외에,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셋째, 여러분의 부모님만큼 여러분을 잘 아시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친구들의 말도 중요하고, 선생님의 말씀도 중요하고, TV 같은 각종 매체들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그런 말들보다 여러분의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장 여러분에게 필요한 말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여러분이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지낼 곳은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신뢰해야 할 말씀은 여러분의 부모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선한 목자로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는 곳이 많지만, 아무리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꾀더라도 주님께서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집에 모이기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모였다가 세상에 나가 살 때에도,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그것도 목자 되신 주님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저와 여러분이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님께서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집에서, 주님의 목장에서, 오직 주님 말씀만 믿고 따르며,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61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260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259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258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257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256 온 생명을 충만케 해주십시오!
255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254 생명의 영이시여, 온 세상을 살리소서!
253 2009 성경공부를 시작하며
252 "주님을 자랑하라!"
251 이런 새해가 되게 하소서!
250 "날을 세는 법"
249 이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248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247 주여, 이 땅을 고쳐 주옵소서!
246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써 주소서!
245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
244 우리 가정이 번성하게 해주십시오!
243 제때에! 알맞게!
242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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