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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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13-11-17 17: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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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시편 46:8-11 
설교일 2013-11-17 
설교장소 한울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감사절 


[오디오파일 듣기/내려받기]

■ 성서 본문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와서 보아라.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꺾고 방패를 불사르신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셀라)

<시편 46:8-11>


■ 들어가는 이야기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농업국가도 아니고, 우리도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땅에서 얻는 것이든, 공장에서 얻는 것이든, 서비스로 얻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감사한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입니다. 한 해의 농사에 대해서 감사하는 여러분 위에, 감사의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은 ‘멈춤’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 멈추기

지금부터 20년쯤 전이지요. 1994년의 일입니다. 그해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쯤 서울 강북의 성수동과 강남의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려서, 승객 32명이 죽고 17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소설가 윤대녕 씨는 그 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강물에 빠진 사람들이 장마에 떠내려가는 가축처럼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꿈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고 압축 성장 시대부터 계속돼온 부실한 개발주의가 초래한 참극이었으며 그로 인해 지난한 목숨들의 최후를 불러온 순간이기도 했다. 그중에는 막 사춘기에 접어들거나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꽃다운 목숨들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속도 지향의 개발을 멈추고 이제 그만 뒤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계시의 순간이기도 했다.” ― 윤대녕,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주)생각의나무, 2005), 293쪽. 그는 그때를 ‘계시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로부터 불과 사흘 뒤에 충주호 유람선에 불이 나서 스물아홉 명이 타죽었습니다. 꼭 한 달 뒤인 11월 20일에는 종암동 육교가 무너져 내려서 버스 운전기사화 택시 기사가 깔려 죽었습니다. 또 이듬해 6월 29일에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돼서 무려 700여 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냈습니다. 그밖에도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로지 ‘개발’이라는 과제만 가지고 쉼 없이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 손 모으기

자동차든 사람이든 나라든 멈춤 없이 달리기만 하면 탈이 생깁니다. 때때로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일 년을 숨 가쁘게 달려오다가 잠깐 멈추고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복된 일입니다. 사람의 몸 가운데서 잠 잘 때만 쉴 수 있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손과 눈입니다. 평상시에는 이 두 지체가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에는 때때로 즐거움과 환희도 있습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 기쁨도 눈을 통해서 옵니다. 가슴 저미게 환상적인 풍경도 눈을 통해서 봅니다. 그러나 손은 어떻습니까? 끝없는 노동과 희생이 있을 뿐입니다. 손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몫이 없습니다. 그런 손이 언제 처음으로 기쁨을 가져보겠습니까? 첫사랑. 그 첫 번째 남자[또는 여자]를 만날 때입니다. 그의 손을 처음으로 잡을 때의 설렘, 그것이 손이 가지는 최초의 기쁨입니다. ― 〈겨울 안개는 깊지 않다〉에서. 한수산, ≪먼 그날 같은 오늘≫(나남출판, 1994), 46쪽. 눈으로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고, 귀로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코로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입으로는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은, 일을 하기 위해서 온갖 거친 것과 더러운 것들을 만져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손으로 첫사랑의 손을 잡는 순간,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요. 우리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손의 수고에 대한 최대의 대접입니다.

■ 주님께 맡기기

어떤 스승이 제자들과 할께 시장 통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소를 줄에 묶어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스승이 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기다리게.” 그리고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남자와 소 옆에 서보아라. 네게 한 가지 묻겠다. 누가 누구에게 묶여 있느냐? 소가 이 사람에게 묶여 있느냐? 아니면 이 사람이 소에게 묶여 있느냐?” 제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소가 이 사람에게 묶여 있습니다. 사람이 줄을 잡고 있으니, 그가 주인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든지 소가 따라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가위를 가져와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소가 도망쳤겠지요. 그 사람은 소를 뒤쫓아 갔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자, 봐라.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이제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있겠지?” ― 오쇼 라즈니쉬(이여명 편), ≪세상을 거꾸로 보는 농담≫(정신문화사, 1996), 213-214쪽.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주인이고 소가 종인 것 같지만, 그 줄이 끊어지는 순간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인이고 돈이 우리의 소유인 것 같지만, 사람은 돈이 가는 길을 따라 기를 쓰고 쫓아갑니다. 돈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지, 사람이 있는 곳에 돈이 모이지 않습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일단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손을 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똑 같이 생업을 위해서 수고하더라도 종으로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 맺는 이야기

오늘의 시편 말씀에 보니까 시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시편 46:10). 손을 멈추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손을 모아서 주님께 감사하는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께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41 일어나, 화해의 대로를 열게 해주십시오!
240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239 매순간 예수님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238 메리 크리스마스!
237 서울의 별, 베들레헴의 별
236 별을 보는 사람들
235 터질듯 한 벅찬 가슴
234 내 안에 계신 예수님
233 예수님의 신부
232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평화
231 아기야, 칼이 되어라!
230 베들레헴의 작은 길
229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
228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227 예수님처럼
226 촛불 네 개
225 동방에서 온 박사들
224 "나에게 두려움 없다!"
223 방은 없었지만…
222 "빛 가운데로 함께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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