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환의 항암일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입니다. 증상과 치료과정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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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기 2006-01-29 16: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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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이사야서 1:1 
설교일 2006-01-29 
설교장소 구미안디옥교회 
설교자 전대환 
설교구분 주일 




■ 본문 말씀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이사야서 1:1)


■ 들어가는 말씀

얼굴만 보면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만 보면 짜증이 나고 하루 종일 괜히 근질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갈 날도 많지 않는데, 남에게 불쾌감을 주기보다는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고, 주님을 믿는 신앙을 이어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희망을 이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가를 다 읽었고, 오늘부터는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격변기, 나라가 위태로운 그 어려운 시기에 예언자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사야입니다. 오늘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1. 첫째,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주는 문제와 관련해서 왜 바른 신앙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왜 희망을 주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서로 희망을 주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주며 살면 세상에 희망의 커지고 그렇지 않으면 절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심은 대로 거두는 세상입니다. 희망을 심으면 희망을 거두고, 절망을 심으면 절망을 거둡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은 생명체가 번성하여 땅과 바다에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주님의 뜻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왕성하게 번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이 없으면, 서로 부대끼며 얽히고설키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지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서로 희망을 주며 희망 가운데 살아갈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른 신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예수 믿고 복 받으며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다 같이 잘 살고 다 같이 천국에 이르러야 하는데, 나만 복 받고, 내 가족만 복 받고, 내 나라만 복 받기를 바란다는 데 있습니다. 자연이야 어떻게 되든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다른 나라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나 또는 우리 집단만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희망을 주는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2. 둘째,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를 바르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보는 일이 왜 필요합니까? 그것은 바른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희망을 준다고 하더라도 거짓된 희망, 잘못된 희망을 줄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에 근거한 희망, 잘못된 희망은 차라리 안 주는 게 낫습니다.

전에 언젠가 말씀 드렸던 것처럼, 숫자의 배열을 생각해 봅시다. 1, 2, 3, 4를 말하면 그 다음에 5가 오고 6이 오리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3, 5, 7을 말하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9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서 5라는 답, 9라는 답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전에 어떤 숫자들이 배열되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의식입니다. 예전에 어떤 숫자들이 있었고, 지금 숫자가 무엇인지 알면 웬만하면 다음 숫자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를 제대로 알고 현재를 제대로 알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과학자가 논문을 조작했다고 해서 과학자의 길을 접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를 만들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난치병 환자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고,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게 되고, 일 년에 수십조의 수입이 우리나라로 몰려들어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인간배아 줄기세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사실에 근거하여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그런 희망은 주지 않는 게 옳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서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과거 문제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는 진실을 숨겼습니다. 1, 2… 하다가 갑자기 9를 말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50이 올 수도 있다고 한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현재의 상황을 거짓으로 판단하거나 주장하면 당연히 미래에 대한 예측은 빗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희망은 차라리 안 주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3. 셋째,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설령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희망은 제대로 된 희망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실패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희망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있는 희망도 숨기고 싶거나 주기 싫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오해를 풀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가 성공하지 않아야 내가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오해 중의 오해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등수 지상주의에서 온 것 같습니다. 학생은 반에서 몇 등, 전교에서 몇 등인가로 평가를 받습니다. 대학생은 자기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몇 등, 세계에서 몇 등인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국가 경쟁력을 말할 때도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몇 등인가, 일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몇 등인가 하고 따집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등수로 따지는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희망을 주고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한 등수 올라가면 내 등수는 한 등수 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서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뒤쳐져줄 수는 없습니다. 경기에 임할 때는 최선을 다해 앞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는 지금 모든 삶이 경기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서로 희망을 주며 살기는 더구나 어렵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경기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경기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희망을 주며 살 수 있습니다.

■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분단된 이스라엘에 살았던 분입니다. 당시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라는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시리아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의 역학관계 속에서 그런 대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의 눈으로 볼 때 남북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겨 그 옛날에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셔서 특별한 사명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잊고 세속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크게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예고했습니다. 자기에게 미칠 불이익을 감수하고 힘 있게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한 것은 자기 백성을 누구보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잘 나갈 때는 경고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패망의 길로 들어설 때는 희망의 메시지를 아끼지 않고 주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사람에게든지 희망을 주는 사람, 곧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은, 나는 손해 보고 남만 잘 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사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희망을 주는 주님의 사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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